<페인 앤 글로리>(Pain and Glory)
욕망을 잃은 채 고통으로 신음하며 매일을 연명하는 늙은 사내가 있다.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허리조차 제대로 구부릴 수 없는 비참한 육체에 갇혀 우울만을 곱씹는다. 반백이 넘은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는 마드리드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그림들에 둘러싸여 칩거하는 영화감독이다.
영화는 물리적 혹은 심리적 매개를 통해 살바도르의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의식의 흐름처럼 문득문득 떠오른 기억들의 편린들을 예쁘고 선명하게 그린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아간다.
연결고리들은 우연과 우연을 거쳐 이어진다. 32년 만에 자신의 영화가 '우연히' 재개봉하면서 첫 시사회 이후 본 적 없던 그 영화를 살바도르가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여배우를 통해 그 영화 속 주인공 남자 배우 알베르토의 연락처를 알게 되고 그를 만난다. 화해인 듯 아닌 듯 32년 만에 조우한 두 남자는 함께 헤로인을 흡입한다. 그 후 '우연히' 알베르토가 살바도르가 쓴 글 「중독」을 읽게 되고 극단에 올릴 것을 요청한다. 헤로인으로 자신의 유년시절을 오가던 살바도르는 충동적으로 「중독」의 상연을 허락한다. 그리하여 '우연히' 극장 앞을 지나던 살바도르의 옛 연인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가 그것을 보고는 자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하고 살바도르를 찾아간다.
이런 우연들 속에서 살바도르는 잊고 있던 청년 시절과 사랑의 열기를 회고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유년 시절 처음 느꼈던 욕망을 상기하는 운명적 '우연'을 다시 만난다. 자신에게 글을 배우던 에두아르도의 그림을 거의 50년이 지나서야 어떤 갤러리에서 만나 갖게 된 것이다. 책 읽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그 그림에서 살바도르는 기절할 정도로 강렬했던 어떤 욕망의 발열을 처음 경험했던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고 30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는다. 살바도르는 에두아르도를 찾는 대신 영화를 찍고, <페인 앤 글로리>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고통이 삶을 소거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일상을 결정한다. 고통 때문에 영광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 내가 영광을 덮어버린 것이다. 욕망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어느 누구도 빼앗지 않았다. 영화 <페인 앤 글로리>는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다시 욕망에 의해 제압당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과거에 대한 미련이 현재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승화시키는, 그런 성숙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