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정지인 역, 2020),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Why fish don't exist), 곰출판
인간은 나약해서 파괴적이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확인하고서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첫째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겸손해지기. 둘째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발악하기. 당연히 후자를 택할 때 인간의 나약함은 포악함이 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속 주인공(?)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1851년생 미국 태생 어류학자인 조던은 분명 위대했다. 신이 내리는 온갖 가혹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념과 소신을 지켜냈으니까. 그는 대지진 때문에 연구실의 모든 표본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이 뒤섞인 가운데, 한 손에는 바늘을, 다른 손에는 바닥의 물고기를 주워 들어 (자신이 손수 부여한) 학명이 적힌 종이를 그 비늘에 꿰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질서를 지켜내겠다는 듯이, 그 어떤 고난에도 결연히 맞서겠다는 듯이.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발견"하고 "수집"해서 이름 붙인 2500여 종의 물고기들을 지켜냈다.
조던은 온갖 종류의 이름 없는 물고기들에게 이름을 하사하여 실재케 했으며 스탠퍼드 초대 총장을 지내며 어류학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비록 그 직책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였다는 혐의가 있었고 우생학이 인류를 구원할 거라고 믿으며 엄한 여자들의 불임을 강제한 한편 절망은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그는 결코 자연 앞에서 겸손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미약함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이 내린 사다리 맨 위에 늘 인간이 존재한다 여겼다. 그리고 실로 미국의 역사는 그를 위대한 학자로 기렸다. 그의 이름을 딴 대로와 건물이 버젓이 존재했으니. (책 출간 이후 사라지고 말았지만.)
저자 룰루 밀러가 이 괴상한 학자를 좇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취약함 때문이었다. 사랑하던 남자가 자신의 외도로 떠났고 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그녀를 절망감으로 몰았다. 이 절망이 밀러를 조던으로 끌었다. 조던은 그 어떤 절망도 기꺼이 극복해 낸 사람으로 보이니까.
밀러는 과학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일찌감치 삶의 의미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광활한 우주 속에서 곧 사라질 미물임을, 세상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존재임을, 그래서 "아무 의미 없음"(nothing)을 아버지의 연구실에서 이미 알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밀러에게 첫 좌절감을 안겼다.
밀러는 조던으로부터 어떤 희망과 기대를 품게 됐다. 어쩌면 아버지가 너무 일찍 알려줘 버린 대명제에 예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는 진리에 대항하는 인간! 혹시나 여기에 삶의 의미가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리하여 어쩌면 지금 자신이 겪는 상실과 고통도 무의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겨났을 테다.
조던이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은 실로 간단했다. 그는 절망을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하는 형이, 사랑하는 딸이 자기보다 먼저 죽었을 때, 그는 추모하고 애도하지만 결코 절망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자연을 수집하고 파헤쳤다. 형이 죽었을 때는 (아직 "어류학"을 접하기 전이라) 식물이었고 딸이 죽었을 때는 물고기였다.
조던은 죽음과 상실로 양손이 허무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모조리 붙잡고 방부제에 절여 썩지 않도록, 그래서 사라지지 않도록 했다. 혼돈이 있으면 정리하면 된다. 끝까지 초월적인 의지를 가지고서 질서와 규칙을 부여하면 그만이다. "신성한 사다리"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자연재해가 모든 것을 무질서로 돌려놓더라도 또 이름을 비늘에 꿰맸듯 방법을 찾고 다시 정리하면 되니까.
그러나 혼돈이라는 자연의 상태를 아무리 분류하고 정리해도 그것은 여전히 무질서 속에 있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어떤 물고기는 바다 어딘가에 그것인 채로 존재한다. 절망은 늘 거기에 있고 단지 우리가 그것이 언제 나타날지 모를 뿐이듯. 죽음과 상실은 자연의 이치니 우리는 그것을 막거나 피할 도리가 없다. 조던이 형의 죽음이나 딸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이것이 조던으로 하여금 물고기에 매달리게 했을 것이다. 상실의 슬픔을 은폐하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절망을 외면하려고. "어류"를 통해 이것을 눈가림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거의 완벽에 가깝게 해냈다. 룰루 밀러와 현대 분기학자들이 밝히기 전까지는. 안타깝게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말에 이르러 버렸으니, 글쎄. 조던의 삶은 유의미한가, 무의미한가? 그의 평생이 다시 무질서와 혼돈 속으로 복귀했으니 유의미한가?
현대 분기학자들은 "어류"는 없다고 말한다. 포유류도, 양서류도, 조류도 존재하지만 "어류"는 없단다.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19세기 분류학자들은 물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물이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싸잡아 "어류"라고 뭉뚱그렸으니까. 이건 마치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지류"(?)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나?
인간이란 이렇게도 미욱하다. 자연은 늘 예측 불가능하고 엔트로피는 상승하기만 한다. 그것을 이기고자 하는 생명체는 분명 자연 속에 인간밖에 없기에, 이런 점에서 인간이란 다시금 경이롭다. 그러니 인간은 나약해서 파괴적이라.
신념에 집착하고 의지와 강박을 구분하지 못할 때 비극은 재현된다. 그렇기에 늘 의심해야 한다. 당연하게 믿는 것이 실은 기만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가령 조던은 빈곤과 타락이 DNA로 유전되므로 그러한 유전자를 박멸하기 위해서 "부적합자"(unfit)의 생식을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과 의사들이 그 당시 이 명제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의 일상이 비극이 되어 버린 것도 그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벌어지지 않았나.
삶에서 의미를 찾기보다 그 의미 자체를 의심할 때 도리어 삶의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자였던 밀러의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삶은 의미가 없고 너는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한 것은, 어쩌면 인간은 중요하고 삶은 당연히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보편적 상식에 문제 제기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는 순간 다른 가능성이 생성된다. 그러니까 내가 중요하지 않고 의미가 없다면 나는 왜 존재하고 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서 사유는 시작되고 다른 지평이 열린다.
혼돈은 온갖 것이 뒤엉킨 상태로 예측할 수 없고 재단할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다. 이것을 뒤집으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는 얘기다. 자연에는 형용될 수 없고 아직 발현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이 잠재되어 있다. 무한한 잠재성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자유이지 않을까. 무엇이든 되거나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자유. 이것이 삶 자체인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무의미하다. 삶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그 의미니까.
밀러가 마지막에 도달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모든 것이 이미 빛나고 찬란하기에 그 빛을 찾으려 다른 곳을 헤매는 것은 어리석다. 미처 조던은 닿지 못한 지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삶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는 걸. 다만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듯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