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주해연 역, 2023),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 글항아리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먹는다. 죽은 자만이 먹지 않는다. 상실의 향은 산 자의 식탁 위에서 다시 피어오르니 음식은 단지 생존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먹는가는 실상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다.
가령 『전쟁 같은 맛』 속 ‘군자’(1941~2008)가 치즈버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녀가 미국인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군자는 조현병을 앓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고 해서 군자의 인생이 더 행복해졌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서도.
경남 창녕 출생인 군자는 한국 전쟁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잃었다. 집안을 대를 이어야 하는 사촌 형제를 위해 군자는 당연하게 학업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나갔다. 무일푼에 학력도 변변찮은 어린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군자는 부산 미군 기지촌에서 일했고 거기서 상선 선원이었던 남편을 만나 딸을 낳았다. 그리고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스무 살 연상의 남편은 미국의 아내와 이혼하고 군자와 결혼했다. 그렇게 군자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약 50년 뒤 사회학자가 된 딸 그레이스는 죽은 엄마 군자를 회상하며 『전쟁 같은 맛』을 썼다.
● 치즈버거
군자는 치즈버거를 좋아했다. 저자의 아버지의 회상에 따르면 데이트하던 시절에도 식사로 늘 치즈버거를 골랐다고 한다. 군자는 왜 치즈버거를 좋아했을까.
한때 식사 예절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교육받은 적이 있다. 기억이 좀 가물가물하긴 한데, 분명한 건 “서양” 식사 예절이었다는 점이다. (그게 “서양”의 수많은 나라 중 어느 나라의 식사 에티켓인지는 지금까지도 모호하지만, 어쨌거나 유럽이겠지…? 미국도 유럽 사람들이 건너가서 만든 나라니까 일단 여기에 포함시키기로 하자.) “포크”와 “나이프”를 어떻게 잡고 써야 하는지, 어느 “나이프”와 어떤 “스푼”을 언제 무엇을 먹을 때 쓰는지 등을 알려줬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나이프”를 칼이라고, “스푼”을 숟가락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이프는 나이프고 칼은 칼이랬다.) 그 어린 시절에도 어렴풋이 가늠하길, ‘내가 이런 도구들을 써야 할 음식을 먹을 일이 있을까?’. 예상대로 없었고 그래서 당연히(?) 지금도 포크와 나이프는 생소하다. (나만 파스타 먹을 때 젓가락 쓰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왜 그런 걸 아이들에게 알려줬을까? 집에서는 쌀밥과 국은 숟가락으로, 반찬은 젓가락으로 먹는 아이들에게.
미국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젓가락 사용법을, 국과 밥, 반찬으로 이뤄진 한국식 식사를 어떻게 먹는지 가르치진 않을 것이다. 당연히 미국은 한국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한국이 따라가야 할 미래는 아니니까. (요즘은 좀 다를까나?) 그러나 한국은 “선진국”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도착해야 할 내일이므로 “선진국”의 모든 것을 본받고 싶다. 그래서 의식주를, 생활양식을 자발적으로 바꾼다. 어제를 지워내고 내일이라 상정된 것에 동화하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히 식문화에서도 작동한다. 먹는 행위는 문화와 사회의 구조 안에서 기능한다.
하여 치즈버거는 내일로 더 나아간 좋은 세상에 대한 맛과 향이다. 미국이라는 꿈과 자유. 가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환상과 욕망. 군자에게는 아메리칸드림이 치즈버거의 형태였던 셈이다. 그리고 아마도 미군 남성들과 어울렸던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 치즈버거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테다. 그녀들은 치즈버거의 기름지고 육중하고 이국적인 맛 속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잠시나마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눈앞의 치즈버거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맛으로 여기며 입맛을 다시지 않았을까. 비록 언제 도래할지, 혹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이더라도.
군자는 치즈버거의 나라로 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자명하듯 미국은 치즈버거처럼 맛있기만 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척박하고 폐쇄적이다. 한국에서 혼혈 아동들을 “튀기”라고 명명하고 배척했듯 미국도 그들과 다른 것을 적극적으로 지적하고 소외시킨다. 그 대표적 사례가 일명 “런치 박스”다.
● 런치 박스
아시아계 교포 2세들의 학창 시절 경험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것이 이 런치 박스다. 그들은 그 시절 엄마가 싸준 점심 도시락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다른 아이들이 놀리기 때문이다. 특히 아시아계 엄마가 해주는 도시락은 그 맛과 향이 일반적인 미국 점심 도시락과 눈에 띄게 다르다. 뚜껑을 열자마자 풍기는 냄새에서 아이들은 “다름”을 단번에 읽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는 저자의 유년 시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먹는가는 소속감과 직결된다. 동일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동일한 정체성이 공유된다. 아시아계 교포 2세들이 기를 쓰고 갖가지 향신료 냄새에 사랑과 정성이 버무려진 엄마의 런치 박스를 거부하고 햄치즈 샌드위치를 먹고자 했던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동화되기 위함이다. 나도 너와 같은 것을 먹고사는 “미국인”임을 증명하고자 함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야 했던 많은 여성들이 겪은 과정과 동일하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많은 이주 여성들이 고국의 음식을 숨어서 해 먹는다고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숨길 수 있으니까.
더구나 군자가 이주했던 1970년대 헤일리셔스는 한국인은커녕 유색인조차 희귀하던 보수적인 동네였다. 과거 KKK 집회가 거대하게 열렸던 곳이었고 지금도 열렬히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군자는 홀로 두 아이(저자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오빠가 있다.)를 키웠다. 한 번 배를 타면 몇 달씩 집을 비운 남편은 생활비도 넉넉히 주지 않았다. 군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 먹었을까.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곤 두 아이밖에 없는 곳에서.
군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음식 만들기를 했다. 음식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듯이.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미국 음식을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은 잘 먹지도 못하는 음식들을 거뜬히 해냈다. 그 음식들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군자는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여기서 나아가 군자는 미국인들이 손대지 않는 블랙베리 같은 열매나 고사리나물들을 숲에서 직접 채취해 가공해 팔았다. 저자의 집은 곧 갖가지 병 조림이나 잼 등을 생산하는 작은 공장이 되었고 저자는 군자의 어린 조수이곤 했다. 군자가 만든 식품들은 질 좋고 싼 음식으로 입소문이 났다. 표면적으로 군자의 미국 진입은 성공적인 듯 보였다. 그러나 저자의 나이 열다섯 일 무렵 군자는 조현병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 조현병
군자의 조현병은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언니의 죽음과 시점이 겹친다. 이 상실로 군자는 더 이상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을 공급받지 못한다. 한국과의 접점이 끊긴 셈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간신히 지탱해 주고 있던 무언가가, 그러니까 해명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던 유일한 누군가를 잃은 것이다. 뿌리내릴 마지막 대지를 잃은 나무는 부유한 채 시들어 갈 뿐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내 조현병 환자의 다수가 이민자들이라 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소외된 이들이 결국 어긋난 현실을 조합하기 위해 환상을 삶 속에 들인다. 그러니 조현병은 사회적인 질병이다. 제대로 뿌리내릴 현실을 찾지 못한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한 것일 테니. “調絃”은 현악기의 음률을 고른다는 뜻이다. 획득되지 못한 “정상성”이 주체로 하여금 들리지 않는 음을 듣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닐까.
군자의 조현병은 먹지 말라는 목소리와 함께 했다. 그리하여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이는 미국인이 되고자 했던 군자의 강렬한 의지와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다.
음식은 먹고 씹어서 몸으로 흡수시키는 것이다. 먹는 행위는 생존인 동시에 욕망과 관련한다. 동화하고자 혹은 동화되고자 하는 욕망. 군자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미국에서 음식을 하고 여러 사람에게 대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이란 사회에 동화되고자 하는 욕망.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흡수되는 것.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흡수되기는커녕 배척당하고 소외되기 일쑤다. 하여 군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주시당하거나 감시되지 않는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간다. 눈에 띄지 않으면 들어갈 자리를 만들 필요도 없으니.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군자는 점점 집안에, 거실 소파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대화에 침잠해 갔다. 음식 만들기를 그만두었고 최소한으로 대충 홀로 끼니를 때웠다. 아시아 특유의 억양이 없는 본토 발음에 자긍심을 보이고 화려한 옷과 화장을 즐기며 여느 남정네들보다 씩씩하게 길도 없는 숲을 헤치고 다니던 군자는 이제 없다. 그러니 저자는 물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엄마는 왜 저렇게 되었나? 무엇이 우리를 여기에 당도케 했는가?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가 있다. 정체가 무엇이냐고 추궁당하거나 불온하다고 낙인찍힌 채 쫓겨나고 마는 이방인. 동일성보다 차이가 두드러져서 흡수되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마는. 아무리 미국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완벽한 영어를 구사해도 끝내 미국인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레이스가 아무리 한국말을 잘하고 능숙하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도 그녀는 끝내 한국인으로 호명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생김새는 한국에서는 “서양인”으로, 미국에서는 “동양인”으로 인식되니까.
군자라고 해서 다른가. (엄밀히 말해서는 부정확하지만) “전쟁 신부”라는 동정의 대상이 되는 쪽이 “양공주”라 불리며 평생 혐오의 대상이 되는 쪽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군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미국으로 떠났을 거라는 점이다. 거기에서도 자신은 불행하겠으나, 아이들은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튀기”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군자는 그토록 그레이스가 열심히 공부하길 바랐을 것이다.
● 맛과 말
어느 날 엄마가 어린 딸에게 묻는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딸은 온갖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 내는 엄마가 자랑스러워서 해사하게 웃으며 당당하게 말한다. 요리사라고. 그러자 엄마의 얼굴이 차게 굳으며 답한다. 너는 변호사도 될 수 있고 교수도 될 수 있고 작가도 될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요리사인 거니. 엄마는 요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것은 해 볼 형편이 안 돼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소한 일”이니까.
변호사나 교수나 작가는 “말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말에는 힘이 있(다고 간주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집중해서 듣는다. 그러나 주부, 즉 주된 가사 노동이 음식 하기인 사람은 단지 먹이거나 먹는 사람이다. 이 입은 다른 이들과 차별성이 없어서 사소하게 치부되고 따라서 아무도 거기서 나오는 말을 듣지 않는다. 군자는 이 사실을 익히 체감했고 딸로 하여금 “말하는 자”가 되길 원했다. 단순히 먹기만 하는 입이 아니라 누군가 들어주거나 들을 수밖에 없는 말을 하는 입을 갖길 바란 것이다.
같은 입인데, 먹기와 말하기에는 층차가 존재한다. 먹는 입은 하찮지만 말하는 입은 고상하다. 블루칼라는 무시하는데 화이트칼라는 대접받듯이. 그러나 이러한 차별은 근본적인 것을 간과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말하는 입도 먹어야만 말할 수 있다. 모든 말하는 입은 먹는다. 입으로 먹고 삼키는 것이 말하는 것에 선행한다. 생명은 먹기를 토대로 탄생한다.
군자의 딸 그레이스는 엄마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공부했고 교수가 되었고 책도 썼다. 많은 학생들이 그녀의 말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고 그녀의 책을 읽기 위해 의자에 앉는다. 하지만 자신의 말이 정말 닿고자 했던 엄마 군자는 그 말들이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더 이상 먹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엄마. 응답할 수 없는 엄마. 그래서 저자는 군자를 대신하여 마땅히 말해져야 했을, 군자의 입으로 발화되어야 했을 이야기를 추적한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해주었던 여러 가지 음식들, 아픈 엄마를 위해 자신이 했던 한국 음식들, 그 음식들을 먹으며 서로의 입에서 입으로 오갔던 이야기들과 공기, 냄새, 기억들을 상기하면서.
그러니 음식이란 결국 다른 방식의 말하기인 셈이다. 어떤 음식들에서 우리는 어떤 기억들을 추억하고야 만다. 그것은 기록되지 못한 역사와 휘발되었던 과거의 감정과 기억을 매개한다. 이를테면 책 제목인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처럼.
“전쟁 같은 맛”은 군자가 분유를 일컬어했던 말이다.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군자를 위해 식사 대용으로 분유를 구비해 뒀는데, 군자가 다른 건 다 먹고도 분유는 일절 손도 대지 않았다. 군자에게 분유는 전쟁을 상기시키는 맛이었던 탓이다. 한국 전쟁 이후 먹을 것이 부족한 한반도에 미국의 원조 식량은 밀가루와 그 분유였다. 우유 분해 효소가 없어 먹고 나면 죄다 뒷간에서 내려야 했던 그 식량. 군자에게 분유는 굶주리고 괴롭고 외로운 시절과 연동되는 음식이었다.
군자에게는 분유가 전쟁을 떠올리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밀가루가 그럴 수도 있다. 이렇듯 무엇이 전쟁으로 환유되는가는 개인적이다. 하지만 맛이 역사로 환유되는 것 자체는 개인적이지 않다. 한 사람의 입이 느끼는 맛은 사회와 구조 속에서 만들어지고 삼켜지므로. 맛은 마침내 말이 된다. 군자의 말은 비록 입으로 전해지지 못했지만 그녀가 했던 음식들이 딸을 통해 남았듯이. 그 음식들로부터 군자의 삶이 전해졌듯이. 말은 죽음 앞에서 소멸해 버리고 말겠지만 맛은 산 자의 손을 통해 식탁 위에서 늘 향기로이 다시 피어오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