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샷 뒤의 여자들』
김지효(2023), 『인생샷 뒤의 여자들』, 오월의봄
자기 전시(혹은 과시)의 욕망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오랜 세월 끊임없이 그려진 초상화와 자화상도 근본적으로는 타인의 시선 속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의 시각화다.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이 욕망은 디카(디지털카메라)와 폴더폰을 거쳐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매체(medium)를 기반으로 “셀카(selfie)”라는 명명 아래 보편화되었다.
자화상이건 셀카건 그 속성은 전시에 기반한다. 2차원 이미지로 재현된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선행하고 이 시선 속에서야 그 얼굴은 의미를 지닌다. ‘너’의 눈동자에 ‘나’의 모습을 담고자 하는 이 마음은 어쩌면 타자와의 접촉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기질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인생샷”은 어떤가. 불특정 다수로부터 아름답다고 경탄 받을 만한 사진 한 장을 건져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리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고를 투자하는 여자들의 마음은 어떤 욕망의 반영일까. 단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인정 받기 위해서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인생샷 뒤의 여자들』은 실상 이 욕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피드 안팎에서 직접 마주한 얼굴들을 통해 구체화한다.
저자의 추적에 따르면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인생샷에도 계보가 있으니 하두리캠과 싸이월드 그리고 얼짱 시대라는 사회문화적 토양이 그것이다. 온라인에 올린 얼굴 사진 한 장이 누군가를 연예인으로 만드는 등 실제적 파급 효과를 불러오면서 새로운 장이 열렸다. 이제 셀카는 단순히 자기 자신을 찍는 것을 넘어선다. 타자에게 보일 자신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한 뒤 조율과 편집을 통해 그것을 재생산하는 차원으로 진입한다.
저자가 인터뷰한 여성들에게 인스타그램은 그냥 단순한 온라인 플랫폼이 아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표현하고 일상을 공유함으로써 오프라인의 ‘나’를 확장한다. 문제는 괴리감에 있다. 비록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이 실제 ‘나’로부터 출발했더라도 “인생샷과 실물” 사이, “피드와 현생” 사이, “인친과 실친” 사이의 거리는 결코 완전히 메워지거나 겹치거나 포개질 수 없다. 그 사이에는 늘 미끄러지고 빗겨 나는 틈이 존재한다.
사실 이 틈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이미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리가 필요하다. 카메라 렌즈와 대상 사이에 거리가 없으면 상이 맺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일정한 빈 공간이 있어야 대상의 전체적인 모습이 나의 시야에 들어온다. 눈에 빛이 들어가려면 동공(瞳孔)이 있어야 하듯 시선은 이미 지울 수 없는 구멍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괴리감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에서 유독 이 괴리감이 유난한 것 같다. 특히 여성들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하고 불화하는 탓이다. 페미니즘을 통해 자신을 억압하는 구조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동시에 불특정 다수로부터 예쁨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또한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내려놓는다. “‘갈팡질팡’은 이미 정해진 결말”이라고, 우리 모두는 완전무결해질 수 없고 평생 여러 세계 사이를 헤맬 수밖에 없다고(312쪽). 그것은 사진 뒤에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숨과 살로 이루어진, 삶을 사는 인격체이기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세계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놓을 수도 없다. 탈코르셋과 인생샷 사이를 오가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분열하며 성장하는 표류할 뿐이다.
실현할 수 없기에 욕망은 욕망이 되고 이해할 수 없기에 타자는 타자로 남는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알고서도, 그러니까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너’의 시선을 좇고, 응답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지의 ‘당신’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와 ‘너’ 사이를 부유하며 이 불가능한 것, 그러니까 빈틈없는 완벽한 접촉이라거나 상처 없는 사랑처럼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게 전부는 아닐는지.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스마트폰을 열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누군가의 피드를 들여다보고 오늘의 나를 어떻게 사진에 담아 올릴지 고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욕망의 민낯이 어떤지 비록 알진 못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