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 맞는 화장실

규격화된 환경에 대한 여섯 살의 문제제기

by 꽃에서 꽃이 핀다

큰 애가 여섯 살일 때다.


큰애와 커피숍 화장실에 들렀다. 어른 키에 맞는 변기에 아이가 손까지 이용하여 올라 앉는 모습이 안쓰러워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아이를 지지해주었다.


"혼자서 앉기는 아직 힘들지?"


스스로 하는 연습이 되도록 이런 도움을 줄여나가겠다고 작정했던 일이 그제야 생각났고, 마음 먹은 대로 하지 못 하고 어느새 아이를 돕고 있는 상황에 대해 변명이 될만한 말을 찾아 건냈다.


"응. 그렇지만 유치원에서는 쉽게 할 수 있어. 어린이 변기가 있으니까."


아이의 대꾸에 어린이 무릎 높이의 작은 변기를 떠올렸다. 높이도 적당하지만 변기통의 지름도 작아서 꼬맹이들이 엉덩이를 쑥 빠뜨릴 일은 없을 것이다. 순간 측은한 기분. 어린이들이란 어른들의 세계에서 참 불편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커서 어른 되면 어른 변기도 쉬워질 거야."


제 몸에 맞지 않는 변기에 매달려 바닥에 겨우 까치발을 대고 있는 아이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던진 말이었다.


"응. 그렇지만 아주아주아주 큰 변기가 있으면 어른도 앉기 힘들겠지?"


아이가 되물었을 때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는데, 아이와 어른의 상대성으로 아이의 불편함을 규정지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남녀 성인의 평균 키에 맞추어 규격화되었을 변기는 아이에게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평균보다 크거나 평균보다 작은 모든 사람에게 불편할 터였다. 조금 까치발을 짚어야 할 때나 무릎이 과하게 접히는 작은 변기에서 나도 느꼈을 불편함이었다. 그동안 나는 그저 그 크기에 순응해야 한다고 믿었음이 틀림 없다. 그러니 나의 불편함에 솔직하지 못한 채 작은 차이들을 감수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표준화 된 모든 크기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을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자'로 치부하고 있었을 지 모른다.


늘 아이가 가르친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인내심과 함께 배우는 것이 있다면 '관점'이다. 시스템에 순응하기 전에 내가 가졌을 의문들. 어쩌면 사회에 맞춰 자라나기 이전에는 누구나 가졌을 부조리에 대한 인식. 왜 모든 변기는 앉는 사람의 크기에 따라 변해주지 않는가 같은 문제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