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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에서 꽃이 핀다 Oct 16. 2024

행복 감독관들에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온전히 내 것인 행복론에 대해

어릴 때 듣기 싫었던 말 중 하나.

“너 정도면 행복한 거야.”


가끔 우리는 불행한 상황에서도 행복하기를 강요받는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라고.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면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는 성적을 매기려는 사람들이 있다. 너는 그 정도면 행복해. 저 사람은 저렇게 가진 게 많아도 행복하지 않을 거야, 저런 건 진짜 행복이 아니야 하며 행복의 크기를 재고 상중하를 매긴다.


그런 사람들과 굳이 행복론을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잠자코 있는다.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톡 쏴 주고 싶다. '내 행복을 평가하는 게 당신 행복이야? 그게 아니라면 당신의 행복이나 챙기시지!'


한 번은 사오십 대 여성이 타깃인 패션 앱의 경쟁 PT를 준비하게 됐다. 사십 대 여성의 일상 속 패션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타깃들을 인터뷰했다. 그런데 사십 대 여성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요즘 사십 대 여성들은 행복하기 참 힘들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은 직업, 육아, 가사를 높은 강도로 수행한다. 가사와 육아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가구의 수익에 대한 책임도 나눠 짊어져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며, 양쪽 모두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비용과 시간은 한정되는데, 여성으로서 자기 관리에 대한 관습적인 요구는 지속적으로 받는다. 여자가 왜 옷을 저렇게 막 입어? 화장 좀 하지, 왜 저러고 다녀? 거울 안 보나? 이런 얘기들을 주위로부터 직접적으로 듣기도 하고, 그런 평가를 미리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가장 가까운 도피처란 돈도 시간도 많은 일부 또래 여성들과 여성 방송인들이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 젊은 피부와 산뜻한 몸매를 선보이는 콘텐츠라는 점이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인터뷰 후 이런저런 토론 끝에 삼십 대 초반의 여성 동료가 사십 대 여성인 나에게 묻는다. 행복하냐고.


사십 대 여자가 행복하려면 조건이 참 많이 필요하다. 나를 꾸미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집도 꾸미고 살 수 있어야 하고, 나도 폼 나는 일을 해야 하고 남편도 돈을 잘 벌어야 한다. 아이들도 공부는 물론 제 할 일을 잘해야 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이 완벽해야만 내가 행복해지는, 이상하게 가혹한 행복의 잣대가 들어온다. "그렇게 부족한 게 많고 인생이 힘든데, 감히 행복하다고 생각해? 행복한 여자들은 그렇게 안 살아."


어릴 때는 행복한 감정을 강요하던 세상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불행한 감정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행복하냐고 물어본 삼십 대 동료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며 회사에 다니는 사십 대 여성의 행복 여부는 어떤 의미가 될까? 그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을 위한 시간을 한없이 빼앗기는 기혼자들은 불행하며, 섣불리 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은 '역시 결혼은 하지 말자'라는 결심을 굳히게 할지도 모른다.


행복하죠, 당연히.

나는 배시시 웃는다. 동료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다.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내 행복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행복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내가 무슨 행복감을 이야기하든,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을 테니. 행여 정말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라도 내가 그에게 결혼하고 육아에 살림에 바빠도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줄 필요도, 행복하지 않다는 확신을 줄 필요도 없다. 그는 스스로의 행복 조건을 만들어야 하고, 그건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다.


다른 사람이 보면 불행해 보일 만큼 인생이 바쁘고, 다사다난해 보이는 날들이 있다. 다행하게도, 행복한 감정이란 사칙연산으로 계산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슬픔이나 바쁨이 무조건 행복에 마이너스가 되지도 않고, 기쁨과 슬픔이 만나 제로가 되는 일도 없다. 대개의 순간에 행복감과 불행감은 공존한다. 성분이 달라서 좀처럼 섞이지 않고, 다만 마음의 공간 안에서 서로 자리싸움을 하긴 한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친 하루임에도 문득 "행복하다"라는 말이 툭툭 나오는 순간이 있다. 주름 관리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내 눈가가 안쓰러운 날도, 계획에 없던 과소비에 남편과 다음 달부터 줄여야 할 지출 항목을 상의할 때도, 바쁜 내 모습이 대견하기보다 안타깝다는 기분이 들 때조차, 행복감은 여전히 있다. 삶의 사이사이에는 여전히 수많은 크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나는데, 작은 조각조차 그 에너지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삶이 바쁘다는 것은, 그런 조각들을 주울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나에게 행복을 묻는 나보다 젊은 동료. 그는 나에게 행복과 나이, 나이와 이해심, 이해심과 상념, 상념과 갈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업무로부터 삶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확인하고, 그 같음과 다름을 주고받고, 상대를 발견하고 나를 표현하는 일들은 그 자체로 설레고 즐겁다. 나는 내가 자라는 것을, 대화 속에서 상대방이 자라는 것을 느낀다. 이런 대화를 나눌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행복하고, 퇴근길로 이어지는 사색이 즐겁다. 피로한 업무 시간, 살림과 육아 시간 속을 걷는 동안에도 행복의 조각들은 무수히 떨어진다. 일의 성공이면 말할 것도 없지만 성공의 과정에서도 성취와 배움이 많고, 아이들의 성장은 늘 긴장과 감동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스릴 넘치는 순간들을 선사한다. 묘하게 두근거리는 모양의 구름과 핑크와 연하늘색이 뒤섞인 저녁 하늘,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신선한 온도로 훅 들어오는 호흡과 길에 나서자마자 딱 맞춰 잦아들어 주는 빗물까지. 와, 이렇게? 와, 지금? 어머나, 이런 걸? 와, 어떻게? 놀랍고 신기하고 즐거운 순간들이 크고 작게 이어지며 바쁘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중첩된 파장을 그린다. 그저 필요한 것은 그 파장도 느끼는 열린 마음뿐이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라 작은 슬픔이나 짜증에도 쉽게 흔들리는데, 다행히 예민하다 보니 소소한 기쁨에도 충전이 잘 된다. 두서없이 적어오다 보니 처음에 쓰려던 행복론이 아닌 이상한 마무리가 되고 있지만, 덕분에 다음에 써보고 싶은 내용들이 우르르 생각나는 걸 보면 글쓰기의 어려움과 글쓰기의 즐거움은 또 중첩되어 있다. 언젠가 그걸 써야겠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행복한 기분이 들게 하는 온갖 것들.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지, 얼마나 사사롭고 흔한 지. 쓰는 시간만큼 피곤하겠지만, 또한 즐거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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