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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에서 꽃이 핀다 Oct 11. 2024

나부끼며 나아가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과 비확신 사이에서

기획서에 활용할 명언을 찾는다. 유명 예술가가 한 말 중에 짧고 의미 있는 말을 찾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라도 무조건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의미는 좋은데 말이 길어서, 불명확해서, 해석이 다양할 수 있어서 써먹을 수 없는 명언들이 많다. 한 시간 여를 뒤진 후에야 겨우 쓸 만한 서너 문장을 건졌다.


그런데 멋진 문장들을 계속 보다 보니,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며 갑자기 멀미가 났다.


"사랑할 수 없는 곳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 (프리다 칼로)


여기서 사랑이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 정도는 아닐 듯하다. 나를 바치고 싶은, 바치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감정. 화가 프리다 칼로의 명언에 나도 모르게 '나 광고 사랑하나?'하고 묻는다. 가끔 이 일을 사랑할 때도 있는데, 시간과 과제에 쫓겨 억지 노동하는 오늘은 평소보다 덜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럼 같이 일하는 사람들, 지금 일하는 이 회사, 사랑하나?' 생각해 봤는데, 멋진 사람들과 일하고 있고 감사한 일들이 많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면 과장일 듯싶다. 사랑할 수 없는 곳에서 시간 낭비 말라는 프리다 화백의 말씀이 속 쓰리다.


사랑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사랑하지 않는 부분까지 잔뜩 끌어안고 살고 있다. 동의할 수 없는 남의 주장을 대신 써주거나,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분야를 연구해야 하거나, 아예 광고나 전략 기획과 아무 상관없는 회사 일에 시달려야 하는 식이다. 늘 원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만, 대충 좀 비중이 칠 대 삼은 돼야 하지 않냐는 말이다. 일 년 중 내가 하는 일에 내가 반하는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대충, 30퍼센트는 되길 바라면서. 아슬아슬하다.


타인은 확신을 갖고 자신의 업을 해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그 확신 속에서 성과에 다가가고, 온라인을 통해 성취감을 고백한다. 나는 아직도 내 일에서 별 자랑할 것도 없는 것 같아서 그런 게시물에 괜히 자격지심이 느껴진다. 링크드인을 보면 특히 그런데, 자기 일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일을 주제로 한 글을 올린다. 그들은 마치, 사랑하는 일에서 제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후회 없이, 좌절 없이.


최근에 연달아 경쟁 PT에서 떨어졌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 갑자기 확신이 안 서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불편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자신도 불편해서인지 동료 중 한 사람이 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과장된 말투로 얘기한다. “하지만 저희, 상반기 내내 연승이었잖아요. 지금이 오히려 평소답지 않은 상황, 아닐까요?” 듣고 보니 그렇다. 연간 승률을 계산하니 작년보다 높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이 단지 기분 탓임을 안다. 그렇지만 진짜 사랑하면, 힘들 때조차 그 사랑에 의심이 안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랑에 의심이 간다면 사랑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PT 몇 번 못 땄다고 내 일이 아닌가 보다 의심하게 되는 거, 이거 사랑이 모자라서 아닐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자꾸 되묻게 된다. 나, 광고 사랑하냐?


기분 탓으로 시작된 고민은 기분으로 해결된다. 명언 다음으로 광고 사례를 찾다가 마음에 드는 광고를 발견했을 때라든지, 뭐 그럴 때. 30초짜리 광고가, 한 줄짜리 카피가, 광고 클라이맥스 직전부터 볼륨이 높아지는 배경 음악 한 소절이, 까망 하늘 가득 별이 차오르는 경이로운 한 장면이 예쁘고 감동적이고 몸서리쳐져서 내 일에 대한 나쁜 기분들이 씻겨 내려간다. 나는 저런 광고를 만들고 싶었고, 광고주가 원하는 광고가 아니라 소비자를 울리는 광고를 만들고 싶었고, 그러면 내가 이 일에 어울리는지 이 일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그래. 나 이 일 좋아하는구나. 나 광고 사랑하나 보다, 싶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할까? 그리고 얼마나 의심할까? 나처럼, 한없이 흔들리면서 나아갈까, 아니면 단단한 직선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흔들리지 않는 방법은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나부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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