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미온수 아래, 정호의 등이 산등성이처럼 굽어 있었다.
선영은 거품이 잔뜩 묻은 회색 때수건을 쥐고 그의 등을 세차게 문질렀다.
그녀의 손에는 분노도, 연민도 없었다. 습관처럼 반복된 감정 없는 손놀림이 있을 뿐이었다.
“어깨 펴.”
찰싹.
살결을 때리는 소리에 정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등은 다시 구부러졌다.
몸은 기억을 잃었고 자세도 함께 잊혀갔다.
요즘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실수를 한다.
배변을 참지 못하고, 부엌에서 욕실을 찾는다.
거울 앞에선 아내 이름을 더듬는다.
딸은 전화를 걸어 “별일 없지?”라고 묻지만 선영은 대답하지 못한다.
딸은 그것을 별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터였다.
커튼을 내리고 창을 닫았다.
세제 향과 뒤섞인 눅진한 냄새가 방 안을 맴돌았다.
기억보다 오래 남는 건 언제나 냄새였다.
어버이날.
아들 내외가 찾아왔다.
카네이션, 홍삼, 그리고 봉투.
“성훈이는 안 왔네. 공부하느라 바쁘겠지.”
정호의 말에 아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장남이고 장손이고, 그런 말 별 의미 없어요.”
아들의 대답에 묵은 거리감이 섞어있었다.
선영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며느리 손에 쥐어주었다.
보탬이 되고 싶었다. 아니, 남겨지고 싶었다.
이 집에서, 이 가족 안에서, 누군가로 남고 싶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정호는 봉투를 열어 돈을 세었다.
곧 등산화를 꺼내 신고, 바람막이 점퍼를 입었다.
거울 앞에 선 그의 눈빛에 생기가 어렸다.
등산로 입구.
보라색 점퍼를 입은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반가운 얼굴인 줄 알고 다가갔지만, 그녀가 아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보라색 점퍼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시선, 외면, 침묵.
선영이 전화를 걸자, 정호는 말했다.
“우린 운명이야. 네가 막아도 소용없어.”
기억은 부서졌지만, 오래된 욕망은 선명했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오르막이 이어졌고, 햇살은 사위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고 산을 오르던 감각이, 아직도 몸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밤.
선영은 잠든 남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는 것을 보니 그녀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선영은 천천히 베개를 들어 그의 얼굴 위로 가져갔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베개를 내려놓았다.
헛웃음 같은 숨이 새어 나왔다.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인 등산화.
선영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봄날의 청계산.
정호는 오늘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기억너머 아주 오래된 약속을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