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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ia May 08. 2020

내일모레 마흔, 두번째 유아기

'이 나이에' 세상에서 숨어버린 17년차 봉급쟁이

# 내일모레 마흔, 경력 17년차 '스댕 미스'


스물 세 살쯤 이후로는 오늘 내 나이가 몇인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살지 않았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인지하고픈 마음이 없어서일 거다.


2020년. 00학번. 성인이 되고 대학에 들어간지도 무려 20년이나 지났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체감하는 나이는 많아봐야 서른 두 살 정도.

내일 모레 마흔이 되도록 뭐 하고 살았나 싶다.


뭣모르던 중고등학생 때에는,

서른 살만 되면,

화이트 톤 대리석 바닥과 커다란 통창 유리로 서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내 성공을 말해주듯 화창한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내 집'에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멋진 차를 타고 달려와 바람을 가르듯 사뿐한 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했었더랬다.


하지만 무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반전세.

말이 좋아 반전세지 보증금 높은 월세방이다.


차는 사회 초년생때 36개월 할부로 산 2006년식 준중형 세단.

차종 구분에 불과한 '세단'이라는 말도 과분하게 느껴지는, 아담하고 짠한 아이다.


2004년 직장생활을 시작해 한 번의 이직 겸 전업을 하고,

무려 17년차 커리어우먼이지만, 골드미스는 커녕 '스댕미스'다.

돈은 나름 모았지만 요새 돈 값은 돈 값이 아니다. 집 한 채 사기엔 어림도 없다.

푼돈 모아 '푼돈'이라고 했던가.


크게 사고친 것 없이, 딱히 누굴 짓밟고 올라서거나 상처준 적 없이,

고만고만하게 회사 다니며 살아오던 나였는데.

올해 들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환기를 맞게 됐다.


짓밟혔다.
가뜩이나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아 끝이 안보이는 달리기와 버티기에 지쳐가던 터에,

무조건적인 복종 강요는 치명타를 날렸다.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현관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점검하며 신발을 신고,

현관문 고리를 잡는 순간,


숨이 안쉬어진다.

발이 안떨어진다.

손이 문고리 돌리는 법을 잊어버린 마냥 안움직인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17년의 내 커리어, 앞으로의 미래, 노후자금, 내 집 하나 없는 현실...

안 쉬어지는 숨을 억지로 크게 쉬어가며, 평가철까지 몇 달을 버텨야했다.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아 주변의 조언을 구해보고, 정신과를 방문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남들이 걸렸다고 하면 가소로워 보이고 내가 걸려도 '환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기엔 조금 민망한 병.

어찌 보면 '병에 걸렸다'고 하기에 어딘가 애매한.

누군가는 "왜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못 해?"라고 고개를 가로젓기 십상인 바로 그 병이 찾아와버렸다.



# 다시 찾아온 유아기


아, 나 속으로 곪았구나.

겉으로는 담배 뻑뻑 피워대며 쌍시옷 욕을 입에 물고 살아서 파이팅 넘치는 투덜쟁이로 보였지만

속으로는 동굴로 숨고 있었구나.


진단만 받았을 뿐인데,

어쩌면 정신과 의사의 유독 큰 눈동자가 모니터 빛을 여과없이 반사해 한껏 그렁거리는 바람에,

눈물이 나왔다.


병원을 나와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북적이는 재래시장 골목을 꾸역꾸역 눈물을 침과 함께 삼키며 걸었다.

겨울이었지만 골목 맞은편에서 쨍하게 쏟아지는 한낮의 햇빛이 따뜻하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엉엉 울 것 같은 내 얼굴을 너무 잘 비춰줄까봐 민망하기도 했다.


나이 마흔에, 마음의 병이라니.

애도 아니고, 내 마음 하나 컨트롤을 못하다니.

직장생활 하루이틀도 아니고, 무려 17년에 그만한 스트레스로 주저앉게 되다니.

나를 탓하다, 나를 이렇게 주저앉힌 누군가를 탓하다,

이도저도 아니고 어중간한 존재가 되도록 나 몰래 껑충 뛰어버린 세상도 원망했다.


곱게 자란 건 인정한다. 하지만 곱게 자라서 나약하지는 않았다.

최근에 나를 찾아온 힘든 일들만으로 내가 무너진 건 아니었다.

수 년 째 거듭해온 미래에 대한 고민, 불안, 갈등이 겹쳐 옴싹달싹 못하게 된 거였다.


내가 나약한 거라고 나를 몰아치는 대신

나는 지금 주저앉고 싶다고,

나만 생각하는 아이처럼 나 하기 싫은 건 다 안하고 싶다고,

그걸 인정하고 나니

평가철을 버티고, 또 다음 프로젝트를 잘 해서 평가철을 버티고,

그렇게 버티고 버티고... 그럴 이유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3개월 동안,

'환자'로 지내는 중이다.


나에게 찾아온 두번째 유아기를, 아이같이 천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도 팔자인지,

코로나19 사태로 예쁜 경치를 구경하러 해외 여행을 갈 수도,

맛집에서 입과 배를 기쁘게 하러 국내 여행을 갈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억누르고 참아왔던 '집순이'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집과 사랑에 빠져들었다.


가장 먼저 몇날며칠 밤을 새고 게임을 했고, 저녁밥마다 소주를 곁들여 영화채널을 봤고,

집에서 라떼 만들어먹을 때 필요한 우유 사러만 동네슈퍼에 갔다.


코로나 시국에 오장육부 사지 멀쩡한 잉여인간의 자발적 자가격리.

아, 결정적인 결함은 있다. 정신병.


폐인처럼 살다 보니 오전 11시에 자서 저녁 7시에 깨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3개월이라는 시간을 일단 벌었으니 뭔가를 하긴 해야겠다 싶었다.


어릴적부터 문구를 좋아했던지라,

초등학교 1~2학년용 일기장 10권 세트를 주문했다.


일기장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핑크색 바탕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표지.

매끈하게 코팅이 되어있어 자꾸만 손톱을 세워 만지작만지작 한다.

내지는 더 아기자기하다.


사각사각, 샤프로 쓰는 오늘의 일기


일기를 쓸 수 있는 칸이 10줄 정도 있고,

맨 아래에는 '오늘의 중요한 일', '오늘의 착한 일', '오늘의 반성', '내일의 중요한 일' 칸이 있다.

연필은 심이 뭉뚝해지는 게 싫어서, 진하고 부드러운 2B 심을 넣은 샤프로 사각사각 일기를 쓴다.


오늘의 착한 일?

...고민하다 적는다.


'쓰레기 버린 것'

'방울토마토 먹은 것'

'일기 안밀리고 쓴 것'

'12시(낮) 전에 일어난 것'

'귀찮아도 밖에 나갔다 온 것'

'5부제 마스크 처음 사온 것'


3개월 동안 '내일의 중요한 일'과 '오늘의 반성'에 가장 많이 등장한 건 이거다.


'글 쓰기'

'저스트댄스(닌텐도스위치 춤추기 게임) 하기'


결국 글 쓰기는 오늘 처음 실행에 옮겼다.


나는 게으른 인간이다.


하지만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건,

눈 큰 정신과 의사가 그랬다.

"진짜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게으르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의사가 나한테 큰 실수를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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