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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ia May 08. 2020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것들

우울증을 다스리는 도구들


# 깨달음


5개월 전 우울증 진단을 받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주변에 토로하면서 체감했다.

주변에 나와 같은 사람이 굉장히 많이 있다는 것을.


최근 직장생활 스트레스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는 인구가 크게 늘었다는 건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터놓고 둘러보니 생각보다 정말 가까운 곳에 착하고, 따뜻했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었다.


아마도 최근 들어 그 인구가 늘어났다는 건, 예전에 비해 정신과 질환에 대한 인식이 바뀐 배경도 클 것이다.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성장이 최우선 가치였던 부모님 세대는

우울증과 같은 질병을 '마음이 약한 병' 정도로 치부하고 자신을 돌볼 여유 없이 달려왔을 테니.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이 나를 한 번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거나, 가족과 친구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줄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나 = 우울증'이라는 현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북적이는 사무실을 떠나, 아침부터 늦은 새벽까지 쉴새없이 울려대는 단체카톡방을 떠나,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꾸고 조용한 새벽시간의 침묵을 즐겼다.


나와 내 안의 나, 오롯이 둘만 함께 누리는 고요함이 조금씩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고

'나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아프지 않은 시절에도 당연했어야 했을 그 깨달음이 선명해졌다.




# 세상 바쁜 집순이


병가를 내고 난 뒤에는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떴다.


어릴 적 내가 좋아했던 것들, 평소에 해보고 싶던 것들,

회사, 일상, 무엇보다 사람에 치어 에너지가 고갈돼 시도하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집 근처 도서관에 다양한 강좌가 있어서, '보태니컬 아트 꽃 세밀화'와 '라인댄스'를 신청했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강좌가 무한 연기돼버렸다.


그래, 집에만 있자.

남들은 힘들게 얻어낸 휴식기에 어디 가서 한달살기도 하고 대륙 일주도 하고 온다는데

난 그냥 집에 있으라는 팔자인가 보다.

자발적 자가격리에 들어간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오늘까지 3개월동안 한 일들이다.


- 초등학생용 일기장에 샤프로 일기 쓰기

- 캘리그라피 펜으로 작은 그림 그리기

- 힐링 악기 '칼림바' 연습하기, 녹음하기

- 좋아하는 펜, 학용품, 노트, 클립, 스티커, 마스킹테이프 잔뜩 사기

- '씰링 스탬프' 맞춤 주문하기, 씰링코인 만들기

- 동네 산책 가기, 작은 동네 꽃집에서 꽃 사오기

- 화초 키우기

- 이케아 구경가기, 작은 소품 사오기

- 조명 바꾸기

- 예쁜 그릇 사기

- 집에 있을 때는 꼭 잔잔한 음악 틀기 (Stan Getz / Yuhki Kuramoto)

- 집 구석구석 어지럽게 나와있는 물건들 정리하기

- 주말마다 컨벡션 오븐에 빵 구워먹기

- 하루에 한 잔씩 커피 내려 먹기


유아기 3개월차 흔적 (일부) : 작은 집을 가득 채운 꽃과 식물, 보관함을 꽉꽉 채운 문구들


- 못 읽고 쌓아둔 수 백 권의 책 읽기, 독서목록 만들기

- 오래 전에 사둬 먼지 쌓인 책 <아티스트 웨이> 시작하기, 모닝페이지 쓰기

- 읽은 책 중 좋은 문장 필사하기

- 이 세상에 나오면 좋을 것 같은 물건들 아이디어 노트에 적기


우연찮게 코로나 시국이라, 주변이나 인터넷에 보면 집에만 있느라 지루하다는 얘기가 많다.

그런데 나는 정말 바쁘다.

집에만 있는데 할 게 너무 많다.

하루 10시간은 기본으로 잘 만큼 잠이 진짜 많은데, 할 게 많아서 잠을 덜 자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다.


꽃이랑 식물을 들여놓다보니

번갈아가며 물도 줘야 하고, 낮이면 창가로 옮겨 햇빛 쪼여줘야 하고,

커피를 내려먹다보니

커피 찌꺼기 버리고, 포트 씻고, 우유스팀기 씻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고,

쓰고 싶은 예쁜 문구를 잔뜩 사놓고 나니

매일 밤마다 내일 할 일을 메모지에 알록달록 적어둬야 하고...




# '아티스트 웨이' - 모닝 페이지, 아티스트 데이트


무엇보다 <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저 / 경당)>를 시작하면서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말을 남긴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 감독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그 감독의 전 부인이 줄리아 카메론이다.


이 책은 내면에 움츠러든 창의성을 깨우기 위해 12주에 걸친 워크숍을 스스로 진행할 수 있게끔 구성돼 있다.

'창의성'이라고 하면 스티브 잡스나 뭐 그런 대단한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거창한 말로 느껴지는데,

사실상 바쁜 생활 속에 잊혀지고 매장당한 가슴 속의 열정을 깨우는 과정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주차별로 다양한 과제가 주어지는데, 12주 내내 해야하는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모닝 페이지'이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기상해서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거나 3페이지씩 노트에 써내려가면 된다.

근데 이게 꽤 부담된다.


몰스킨 노트를 나의 첫 모닝페이지 노트로 선정했는데, 몰스킨은 칸이 빼곡하니깐 2페이지만 쓰기로 했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는 꼭 배가 미치게 고파서 뭘 집어먹고, 커피 먹고, 배 아파서 화장실 가고, 씻고,

엄마랑 통화하고, 쓰레기 좀 치우고 하다 보면 시간이 후루룩 지나버린다.

그래서 보통 늦은 오후나 늦은 밤, 때로는 새벽에 자기 전에 쓰기도 한다. 모닝이 아닌 모닝페이지다.


주차별로 인덱싱한 <아티스트 웨이> / 모닝페이지 몰스킨 노트


첫 페이지는 일기가 되기 십상이다. 어제는 뭘 했고, 오늘은 뭘 해야하고, 내일 해야 할 일은 뭐가 있고.

두 페이지나 뭘 채우나 싶어 한 줄 쓰고 '뭐 쓰지?' 또 한 줄 쓰고.. 첫 페이지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그러다 두번째 페이지쯤 되면 슬금슬금 속마음이 흑심을 타고 기어나온다.

어떤 날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솟구치며 동기부여가 쏟아지지만,

'시간또라이' 마냥 다음 날엔 자책과 비관,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우울함이 종이를 휩쓴다.


병가를 내고 처음 한 일인 '초등학생용 일기장에 일기 쓰기'는 진짜 그날 한 일만 시간 순으로 적는 반면,

모닝페이지는 '생각'과 '마음'을 적는 셈이다.


총 12주 워크숍 과정에서 이제 6주차에 접어들다 보니,

어느날 문득 머리 속에 가득찼던 찌꺼기들이 많이 청소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병가 내고 쉰 덕분인지, 모닝페이지를 쓴 영향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마음과 생각을 노트에 쏟아냄으로써 머리 속에 그제야 여유공간이 생긴 게 아닐까 싶다.


모닝 페이지 외에도 다양한 과제가 있어, 모두 챙겨하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과제들이다.


- 내면의 아티스트와 데이트 하기 (평소 내가 좋아하는 활동 하기 : 전시회, 쇼핑, 창작활동, 요리 등 무엇이든)

- 어릴적에 좋아했던 일들 적어보기 / 그 중에 하나를 골라 해보기

- 해보고 싶은 직업이나 꿈꾸는 인생 적어보기 / 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연관된 활동 해보기

- 이미지 스크랩북 만들기 (내가 꿈꾸는 것, 좋아하는 것, 갖고 싶은 것 등)


평소 문구를 너무 좋아해서 출근할 때에도 자비로 온갖 펜을 주문했던 나이기에,

나의 아티스트 데이트는 주로 문구 쇼핑이었다.

코로나라 어딜 돌아다닐 수 없으니 온라인으로 했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요새는 온라인 숍이 물건도 다양한데다 한 번에 주문할 수 있고, 더구나 빨리 받을 수 있어서 편리하니까.

(덕분에 1주일만에 텐바이텐 VIP가 됐다.)


세 들어 사는 집이라 대충 되는대로 해놓고 살았는데 집에만 있다보니 여기저기 아쉬운 게 보여서

조명도 바꿔 달았다.


마루 기존 조명은 정말 하얗다 못해 푸른빛을 띠는, 수술실에 써도 될 법한 LED 형광등이었다.

그 빛이 너무 싫어 평소에는 장스탠드 하나를 상향조명으로 켜두고 살았는데,

책을 읽기에도 너무 어두워 별도 조명이 필요했었다.


3만원짜리 프레임을 사서 셀프 교체에 들어갔다.

기존 프레임을 떼어냈더니 잿빛 스테인리스 판넬이 크게 드러났고,

마감도 엉망인지라 벽지가 삐뚤빼뚤 잘려 콘크리트가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림 그리려고 사둔 아크릴 물감 하얀색을 다 먹은 햇반 용기에 짜서 칠해줬더니 그나마 깔끔해졌다.


이쁜 LED 에디슨전구를 사다 끼웠더니 만족스럽다.

공간이 행복해졌다.


마루 조명에서 멈추지 않고 침실 간접 조명도 달았다.

이케아에서 사온 전구 소켓만 달린 콘센트형 전선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LED 전구를 끼워줬다.

커튼 봉에 S고리로 달아주니 침실이 아늑하고 반짝반짝 기분이 좋아진다.

밤에는 반짝거려 예쁘고, 낮에는 햇빛을 받아 오로라 빛을 반사시켜 또 예쁘다.





# 공간의 중요성


내 취향에 맞춘 공간의 행복함.

왜 세 들어 사는 '내 집 아니'라는 이유로 2년 동안이나 그 싫은 조명을 참고 살았던 걸까.

진작 바꿀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제부터라도 만끽하면 된다.


예전에 부모님 집에 살 때에도 내 방을 리모델링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바닥 색도 바꾸고, 벽지도 새로 바르고, 침대부터 책상, 가구까지 전부 교체했었는데,

리모델링이 내 생활습관마저 바꿔버릴 만큼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바꾸기 전에는 언니가 쓰다 물려준 화장대에 온갖 화장품이 먼지가 쌓인 채 지저분하게 널려있었고,

의자에는 일주일동안 입은 옷이 차곡차곡 얹혀있어 의자를 뺄 때마다 뒤로 넘어가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옷장 문을 열면 개지 않고 쑤셔넣은 옷들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방을 바꾸고 나서는 모든 게 달라졌다.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모든 물건은 정리된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갔고

의자에는 옷이 쌓이지 않았으며, 책상 겸 화장대는 가지런히 정돈돼있었다.

내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고 집에서 업무를 해야 할 때에도 예쁜 카페에 간 것 마냥 즐거웠다.


왜 잊고 있었을까. 공간의 중요성을.

내 취향대로 꾸민 방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 정돈된 물건들이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을 보고,

해질녘에 예쁜 조명을 켜서 저녁 시간을 더 안락하게 보내는 즐거움.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카페보다 더 편안하고 분위기 있게 즐길 수 있는 그 행복을.


어쩌면 그 동안 각박한 감옥 같은 회사 사무실, 네모난 버스, 내 집이 아닌 집을 오가며

내가 오롯이 편안함을 느낄 공간이 없어 더 우울했던 건 아닐까.

내 고민을 편안하게 털어놓을 길이 없어서 더 힘들었던 건 아닐까.


내면의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나의 공간, 내면의 나와 대화하는 글쓰기.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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