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hlia May 08. 2020

짓밟힘 : 사람이 싫다

자발적 소외, 영혼 없는 대인관계

# 중간 점검 _ 우울함의 원인 들여다보기


인정한다. 나는 16년 내내 '회사 관두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아왔다.

2004년부터 쉬지 않고 계속해 온 직장생활이 어느새 나를 번아웃 상태로 몰아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이 아니라 '사람'에 치었다.

일이 힘들고 많은 건 궁시렁궁시렁 하면서도 어떻게든 하고 마는 성격이었다.

일은 끝내고 나면 성취감이 드니까. 내가 스스로를 칭찬할 '과정'이 남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달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까지 인간을 '부품' 취급하는 느낌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똑같이 인간의 언어를 쓰고, 그 중에서도 같은 한국어를 쓰고,

똑같이 눈동자 두 개에 코, 입, 귀가 달린 인간인데

상대방이 소시오패스가 틀림없다는 확신까지 들 만큼 사람 사이에 벽이 느껴지긴 처음이다.


정말 책에서나 봤던, '산업혁명'으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

인간이 그 이상 무엇도 아닌 '노동력'으로만 취급받는 인간 고유성과 존엄의 상실.

딱히 날카롭게 가시돋힌 말로 나를 공격해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인간을 언제든 대체 가능한 무수한 노동력 중 하나로 절하시키고,

조직을 와해시키고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어둠의 세력으로 윗선에 보고를 해뒀을 뿐이다.

 

차라리 대놓고 '너 싫어' 티내며 말이나 행동으로 거칠게 대하는 편이 인간적이다.


인간 대 인간이, 본인 의지대로 한 인간의 가치를 짓밟아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누굴 위해 그런 대우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내 스스로가 무너지는 괴로움 속에서도 월급이라는 마약을 얻기 위해 버텨내는 게 정답인걸까.




# 뿌리 깊은 파벌주의, 자발적 소외


한국의 기업은, 조직은, 관성 하나는 정말 일관성 있게 대단하다.

말로는 변화와 혁신을 외쳐대지만, 속에는 여전히 '예스맨'들과 파벌주의, 줄서기가 만연할 뿐이다.


실력보다는 보고 제일주의의 '사바사바'가 출세의 중심이 되고,

그 중심에 선 자를 기준으로 줄 서기를 하고,

그 줄에 선 자들끼리 파벌을 만들고,

'화석'에 가까운 '성골' 출신들의 끈끈한 밀어주기.

그들만의 보직 계승, 그들만의 리그다.


조직의 발전을 위해 시행한다는 '상향평가'와 '조직문화 평가'는 유명무실 그 자체다.

평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보복성 하향평가로 되돌아온다.

"내가 너희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라며 상처받은 표정을 지어보이다가,

이내 "조직 평가가 좋지 않으면 너희들 평가도 좋게 줄 수가 없는 시스템이니 아쉽게 됐네"라고

갈치마냥 뼈로 가득 찬 말을 날려준다.


본인 평가 결과가 작년보다 낮아졌다며, 파벌에 속한 저들이 본인보다 잘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며,

작년에 본인에게 왔던 그 등급이 저 아이에게 간 것 같다며,

씩씩대면서 불만을 쏟아내는 후배들.

공정하고 투명한 조직으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도록 선배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파벌에 대한 우려와 구성원들의 불만을 전달했지만,

돌아온 건 '부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반동분자 낙인이었다.


한 두 달 뒤,

그 후배는 파벌에 녹아들어 쉴새없이 웃음을 쏟아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내가 정말 '조직'의 생리를 잘 몰라서 이러나.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나대서 나만 피를 보는구나.

후배를 챙길 이유 따위는 없었던 건데, 나 살 길만 찾으면 되는 거였는데.


그렇게 마음을 닫아가면서

점심을 함께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후배들과도 어느새 대화조차 하지 않게 됐다.

웃을 일도 없어졌고, 무표정하게 영혼 없는 대인관계를 하다 보니

'중심'인 그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몇 년 간 같은 팀에서 함께 일해온 동료라고 믿기 힘들만큼

내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공기가 달라지는 게 느껴질 만큼, 이질감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영혼 없는 관계를 택한 건 나였다.

애초에 직장 선후배, 동료 관계에서 '진심'과 '배려' 따위는 나에게 독만 될 뿐인데

그걸 당해보고서야 깨달았으니, 그제라도 보호막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들이 나를 소외하도록, 내가 자발적 소외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씁쓸했다.

이익 따라 누군가를 조종하고 실세따라 움직이는 이중성.

그렇게 변해가는 누군가의 모습.


짜증도 났다.

철저한 복종을 댓가로 파벌을 형성한, '중심'인 그들의 웃음소리만 들어도 살인충동이 들 만큼

사람이 싫어진다.


이건 일을 하는 게 아니다.

매일 아침 내 발로 걸어서 독방에 갇혀 노역을 하러 오는 것일 뿐.

어떤 성취감도, 보람도, 발전도 없는 일상.

한 번밖에 없는 내 인생의 하루 9시간을 한 달 몇 백의 월급으로 치환받는 것.


차라리 그들로부터, 아무리 세대가 바뀌어도 그 지긋지긋한 관성대로 흘러가는 조직으로부터,

나를 떼어내는 게 내가 살 길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말하겠지. 내가 떼어낸 게 아니라 내가 '떨어져나갔다'고.




# 연봉의 망령


연봉 0000만 원.

내 인생 16년을 쏟아부어 만든 나의 가치.

 

만족스러운 금액은 아니지만 이 수준까지 올라오기 위해 내가 희생해야 했던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간다.

에너지가 충만하던 나이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드리지 못한 부모님, 만나지 못한 친구들,

더 행복하게 만끽할 수 있었지만 만성 스트레스로 웃지 못하고 흘려보낸 여행의 순간들.

소소한 기쁨을 주는 계절의 변화들, 풍경들.

그 나이에 해야 했던, 그 나이가 지나면 힘들어지는 그 모든 것들.


그렇게 쟁취한 노동의 댓가를 소시오패스 인간 때문에,

능력이나 인사이트라곤 없고 충성심과 복종, 보고, 내리꽂기로 살아남은 그 인간 때문에,

17년의 경력과 함께 내려놓는다니.


억울함이 든다. 원망스럽다.

연봉의 숫자, 월급의 숫자가 수시로 머리 속에 둥둥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정말 이 숫자를 포기할 거냐고.


16년만에 '소득 제로'인 인생을 살아갈 준비가 돼있긴 한 거냐고.

어떤지 상상이나 해본 적 있냐고.

넌 20살이 아니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애절하게 몸부림친다.

정말 돌아가기 싫다고. 나를 더 죽이지 말아달라고.


우울하다. 우울해도 어쩔 수 없다.

우울함을 극복해가는 과정이지만 우울함이 또 사무치는 건 어쩔 수 없다.


한 번도 내 손으로 행복함을 얻어내지 못하고 참방참방 들어찬 우울함에 빠져 살아가느니,

한 번이라도 행복이란 걸 내 손으로 얻어내보고 싶다.


결국 얻지 못해 오늘의 선택후회하더라도,

우울한 일상의 반복으로 생을 마감하는 후회보다는 나을 것 같다.


이 원망과 상처를 지워내고

사람을 믿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세상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치가 떨려 곱씹었던 기억들, 표정들,

머리 속에 가득 찬 그 쓰레기들이 모두 없어지기를.


작가의 이전글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