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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ia May 13. 2020

냄.새.중.독

취향을_존중해_주세요

# 비 오는 냄새


지난 주말부터 계속 비가 오다 모처럼 화창해진 하늘이 반가웠다.


그래, 봄은 봄답게 화창해줘야지.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비가 참 싫다.

나이가 들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비는,

찝찝하고, 우울하다.

어둡고, 산만하다.


뭣보다

비 오는 날의 냄새가 싫다.

세상의 온갖 만물이 비에 젖어 내는 냄새.

축축한 공기, 물 비린내.

머리숱 많은 반곱슬인지라, 넘쳐나는 수분에 삼손마냥 부풀어오르는 내 머리칼도 싫었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집 밖에 나갈까 말까한 생활이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큰 영향이 없는데도,

일기예보에서 '언제부터 비 온다'고 하면 여전히 기분이 나빠진다.


유독 비 냄새는 나를 가라앉혀버린다.




# 기생충 없어요


사실 나는 만성 알러지성 비염이다.

꼬깃꼬깃 접은 비상용 휴지를 주머니에 항상 챙겨 나간다.

(가끔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다 소리지르게 만드는 주범이다.)


코가 시원하게 뚫려있던 게 인생 통틀어 1시간이나 되려나.

상습적인 훌쩍, 훌쩍.


그런데 신기하게 냄새를 정말 잘 맡는다.

내가 먼저 맡고 30초 지나야 주변 사람들이 맡는 경우가 많은데,

코막힘에도 굴하지 않는 예민한 후각 탓에, 냄새에 집착한다.


특히나 좋아하는 냄새들이 있다.


- 책을 펼쳤을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종이 냄새

- 갓 인쇄된 따끈따끈한 프린트물에서 나는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

- 맨들맨들 반짝이게 코팅된 종이(주로 잡지 표지)에서 나는 냄새

- 미술용 4B 연필을 칼로 깎을 때 솔솔 풍기는 나무와 흑심 냄새

- 크레파스 냄새와 지구색연필, 크레욜라 크레용, 포스터물감 냄새

- 벼루에 먹을 갈 때 찰랑찰랑 먹물을 타고 퍼지는 짙은 자갈 냄새


이런 냄새를 선물해주는 물건을 마주하게 되면,

주변 시선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코를 갖다댄다.


사무실에서도 프린트가 나오자마자 집어 냄새를 맡으며 자리로 돌아오고,

서점에서 새 책을 펴면 목차나 첫 장을 읽는 게 아니라, 중간 아무데나 펼쳐서 냄새부터 맡는다.


어릴 때는 시험 시간도 힘들었다.

앞자리 친구가 시험지 뭉치를 어깨 뒤로 넘겨줄 때, 그리고 문제를 풀 때에도,

그 고소한 잿빛 갱지 냄새에 온 신경을 빼앗겼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자꾸만 냄새가 맡고 싶어 책상에 고개를 쳐박고 풀었다.


사실 정말 희열을 느끼는 냄새는 따로 있는데

미리 선을 긋자면, 일탈을 한 적은 없다.

(이 냄새들을 얘기하면 나를 보는 시선이 하나같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 주유소 냄새

- 페인트, 니스(바니쉬) 냄새

- 돼지표 본드 냄새

- 수기 영수증 냄새

- 종이신문 냄새

- 스티커, 테이프의 접착면 냄새


초등학생(국민학생) 때 학교에서 국기함을 만든 적이 있다.

잘라진 나무판을 조그만 못으로 탕탕 박아 네모를 만들고

마지막 작업이 붓으로 '니스'를 칠하는 거였는데,

(요새는 '바니쉬(varnish)'라고 부른다. 박카스병과 닮은 - 크기는 3분의 1인 - 병에 담아 팔았다.)


톡 쏘는 그 냄새가 너무 좋은 나머지

문방구에서 두 통인가를 더 사다가, 굳으면 또 칠하고, 또 덧칠하고,

냄새를 맡고싶어 계속 덧칠을 했었다.


요새도 그런 말들을 하는지 모르겠다.

"주유소 냄새, 본드 냄새 같은 거 좋아하면 몸에 기생충 살고있는 거"라고.

내 취향을 기생충 탓으로 돌리다니.


저 기생충 없어요.

매년 봄, 가을마다 구충약 챙겨 먹어요.

취향이라고요.





후각이 민감하고, 냄새가 가득한 개들의 세상에선 '개인의 취향'도 존중되지 않을까.


9년 전에 떠난 나의 하얀 강아지는

김과 다시마 냄새만 맡으면 달려들었다.


나는 개였을 거다.

그게 전생인지 현생인지 약간 헷갈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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