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우리는...
- <단편소설>그 겨울, 열아홉 1
지구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1999년.
누군가에겐 끝이라고 여겨지던 그 해. 하지만, 나에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그 해.
지금, 그 해의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새해가 되고, 고3 선배들이 없는 학교. 아직 고3으로 진급하지 않은 우리가 이제 이 학교 최고 선배가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수긍하며, 고3 대접(?)을 받아들였다. 그 대접이란 것이 겨울방학이랄 것도 없이, 1월 2일 화요일부터 바로 시작되는 보충 수업일 뿐이지만... 이대로 고3이 되기는 너무 아쉽다고 남학생반은 술렁거렸다. 누가 시작하자고 했는지, 주동자를 알 수 없는 음모가 시작되었다. 바로, 보충 수업 첫날을 단체로 과감히 땡땡이 치자는 것.
보충 수업이라도 학교 가는 날은 교복을 입는 게 당연하겠지만, 동참하는 자는 사복을 입고 등교할 것. 아침 조회에 참여한 후, 조회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보충 수업이 시작하기 전 엑소더스를 감행할 것. 참여는 자유나 그다음 뒷일은 본인이 감당해야 됨을 명심할 것. 단, 이 한 번의 땡땡이가 고3 전체의 마지막이 되도록 할 것.
이 것이 고3으로 시작하는 보충수업 첫날의 약속아닌 약속이었다. 이 정도 음모면 첫날부터 담임 선생님을 격노하게 할 대단히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 미안한 만큼 나름 담임을 배려한 면(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도 있는 멋진 약속이었다.
이 음모는 2년 동안 선생님 말씀 따라 착하디 착하게 공부만 했던 우리가 고3 보충 첫날에 헛짓을 해보지 않으면, 고3 스트레스 절정일 때 땡땡이 사고를 길게 칠지도 모른다는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서 우등반 누군가의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마치, 새 신발 첫 마수(나 초등때 유행한 행동으로 새 신발을 신고 오면 밟아주는 것)처럼, 고3 생활의 첫 마수라고 할까? 첫날 엄한 짓을 해봐야 스트레스 액땜하고 그 이후로는 얌전히 공부만 할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무어라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이 음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묘한 동의를 얻으며 동참자가 늘고 있는 추세였다.
그 동참자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선 한 남자를 빼놓을 수가 없다. 뽀얀 피부에 쌍꺼풀 없이도 커다랗고 깊은 눈. 그 아래 바르게 곧게 뻗은 코. 윗입술은 살짝 얇지만, 아랫입술은 조금 도톰하니 차분하게 다문 입술. 다소 짙고 굵은 눈썹 아래 이목구비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 제법 훈남의 이미지를 뿜뿜 하는 한 남자. 선한 눈매로 한없이 다정해 보이는 그는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인정받는 모범생이자,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나의 남자 친구이다. 크리스마스때 고백을 받아 사귄 지 불과 일주일 밖에 되지 않은 나의 연인.
보충 첫날 땡땡이 음모는 사실 그의 반에서 시작되었다. 모범생인 그는 전혀 휩쓸리지 않거나, 휩쓸리더라도 한번쯤 마음 흔들리고 말 줄 알았는데, 고민도 하기 전에 남자 A반의 음모를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의 고민은 그 음모보다 더 과감하게 단순한 땡땡이가 아니라 나와 손잡고 학교를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고3 생활 첫 마수를 엄청 세게 할 모양이다. 물론,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조용히 혼자라도 남아서 공부할 참이라고 했다. 오히려, 나와 사귀지 않았다면, 고민하지도 않고 동요되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고3 담임의 입장에서 보면, 참 고약한 짓거리임에 분명하고, 젠틀한 면이 많은 그는 그런 고약한 짓거리를 하는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도 소심한 모범생이었다. 그가 사귀자고 했을 때도, 일반적인 연애감정보다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갈 때 두렵지 않을 만큼 든든한 가드가 한 명 생기는 정도로 생각하고 수락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나자는 첫 데이트가 도서관 가는 것이 아니라 땡땡이를 치자고? 그것도 여학생반에서는 그 음모에 동참할 학생이 몇 명인지 알 수도 없는 데다, 학교 가서 선생님께 어떻게 무어라 핑계를 대고 빠져나올지 도통 감도 잡지 못하는 나에게?
남자 친구는 강요하지는 않았다. 첫 데이트를 이렇게 하자고 말 꺼내는 것부터가 조심스러운 듯했다. 나는 상상을 하며 고민을 했다. 혹여나 여학생 반에도 소문이 나서 빈자리가 많은 교실에 홀로 남아 고2로서 느낄 수 있을 마지막 여유로움과 고3으로서 쉴 수 있는 마지막 휴가의 기회를 놓쳐서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동요된 마음 반과, 반대로 우리 반 친구들은 음모에 동요됨 없이 차분하게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있는 데 나만 뛰쳐나가서 1년 내도록 담임에게서 미움을 받지는 않을까, 설상가상으로 집으로 연락이 가서 착하고 멋진 남친을 이제야 사귀기 시작했는 데 바로 끝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부동의 마음 반. 음모에 가담하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지만, 담임에게 들이댈 설득력 있는 핑곗거리를 찾지 못하여, 갈팡질팡하며 다음 날 아침까지 고민을 했다.
다음날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남자반 아이들 몇 명이 우리 반 복도를 지나 다다닥 도망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다다 다닥. 다다다다닥. 줄지어 도망치는 학생 수가 적지는 않다. 뒤이어, 24시간 복도를 순회하셔서 '이사도라'라는 별명을 가진 무서운 고3 학년부장 선생님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 복도를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파악하려 복도로 나가셨다. 담임 선생님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나는, 창문 너머로 복도에 서있던 남친과 눈이 마주쳤다.
사진만으로도 설레어라~ <출처:여신강림>,
아~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다. 평소 같으면 우물쭈물 어찌할까 고민부터 했을 내가 벌떡 일어나서 어느새 교실 밖 남자 친구 앞에 서있었다. 교실 뒷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남자 친구는 내 손을 꽈악 잡았다. 마치, 각오가 되었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남친의 따스함이 내 손에 느껴지는 순간, 내 시선은 자연스레 손으로 옮겨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앗! 깜짝~. 담임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뭐라고 말을 해야 되는 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신다. 뭐지?
담임 선생님은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사태를 이미 예견하고 계신 듯, 나에게 묻지 않으신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그래보겠어. 잘 다녀와."
'흐윽~ 정말 오늘 하루만입니다. 선생님.'
감히, 입밖으로 소리내진 못하고 있을 때, 남자친구도 놀라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나와 박자를 맞춰 담임 선생님께 재빠르게 배꼽인사를 한다. 그리고선, 곧장 손을 꼬옥 잡고 교복치마를 펄럭이며 복도 끝 엘리베이터를 향해 힘껏 달렸다. 평상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학생들은 엘리베이터 사용 금지였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무단 탑승을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쫓아오던 학년부장 선생님을 따돌리게 되어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다.
"(헉헉), 괜찮아?" 내 표정을 살피며 남자 친구가 묻는다.
"(핫핫)...."
거친 숨소리에 말없이 조용히 미소만 지으며, 이제야 남친을 제대로 바라본다. 검은색 코트 아래 옅은 민트색 니트. 그 아래 하얀 티셔츠. 생지 청바지에 하얀색 스니커즈. 키 178에 조금은 마른 편이지만 어깨가 넓다. 단정하다. 단정함에 다정함이 묻어있다. 오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단정함에는 여자 친구를 배려하는 다정함이 배어있다. 다정한 질문이 어느새 따스함이 되어, 겨울임에도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는 훈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