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에 물들어
-<단편소설> 그 겨울, 열아홉 5
영화관을 빠져나오자,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 번화가의 백화점도 가게들도 얼추 오픈했다. 주전부리를 먹기는 했지만, 팝콘의 70~80%는 영화 관람 중 자꾸만 쳐다봤던 최애(남친의 별칭)한테 다 먹인 듯하다. 학교에 있었다면, 벌써 매점 가서 샌드위치, 핫바에 바나나 우유를 뚝딱했을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많이 먹는다는 건 최애에게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배꼽시계가 거짓말을 못했다. 다행히, 아침을 일찍 먹은 최애도 팝콘을 많이 먹었음에도 배 고픈 눈치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날 배려한 연기 같기도 하다.
"아~ 출출해. 배 고프지? 밥 먹으러 갈까? 저쪽 백화점 쪽으로 걸어가면 그 주위에 괜찮은 곳이 꽤 있어."
나름 데이트라고 분위기 있는 식당을 찾으려는 것 같아 보인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최애가 하루종일 비용을 다 계산할 것을 생각하면, 지금 최애의 주머니 사정이 괜찮다 하더라도 내가 용납할 수는 없었다.
"분위기 좋으면 좋지만, 지금은 너무 배가 고프니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곳에 가자."
"잠깐만~!"
"어, 왜?"
그새 최애는 코트가 바닥에 닿을 듯 무릎을 꿇으며 깍지 낀 손을 푼다. 순간 깍지 풀림에 놀라 최애를 쳐다보니,
"신발끈 풀렸네. 우리 댕댕이 몰랐어?"
무릎까지 꿇고서 신발끈을 묶어주는 모습. 내 동생을 데리고 다니시는 아빠의 모습 같다. 참으로 곰살스럽다.
"자아~ 이제, 출발!"
다시, 내 손을 잡아 깍지를 낀다.
"제일 가까운 곳은 여기 버거KING이네. 들어갈까?"
동의하려던 찰나, 햄버거면 입을 크게 벌리고 내용물을 질질 흘리면서 먹을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첫 데이트부터 나에 대한 환상을 깨줄 필요는 없으니까. 또한, 오늘같이 하루종일 신세 아닌 신세를 져야 되는 상황에서는 세트메뉴도 가격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마이갓! 벌써, 오늘 하루종일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다니, 학원 따윈 안중에도 없다.
"아니, 그보다도 속에 따뜻한 것이 들어가면 좋겠어. 저기 포장마차 어때?"
"우리 댕댕이가 좋다면, 난 다 좋아."
최애는 진지할 말도 가볍게 무심히 툭툭 잘도 던지는 데, 그 말 한마디에 자꾸만 의미를 싣게 된다. 내가 이렇게 쉬운 여자였나? 새로운 내 모습을 자꾸 발견하게 된다. 난 지금 '금사빠(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가 되는 중이다.
포장마차에 들어서자, 최애는 이것저것 하나씩 골고루 주문을 시작한다.
"떡볶이 1인분, 순대 1인분, 튀김 1인분... 호떡이나 오뎅은 능력껏 먹자."
마지막 말에 두 눈을 찡긋한다. '많이 먹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같은 말인 데도 이쁘게 할 줄 아는 게 놀랍고, 말을 하면서 동시에 입 외에도 얼굴의 다른 근육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게 신기하다.
난 주문이 끝나기 무섭게 퍼지지 않은 넓적한 오뎅 꼬치를 하나 덥석 집었다. 최애는 뭐가 좋은 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또 빙그레 미소 짓는다. 손을 놓으려는 데, 손은 놓아주지도 않고서... 난 오른손을 사용할 수 있어서 괜찮지만, 최애는 왼손으로 잘 먹을 수 있을까 조금 염려되는 데 말이다.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왼손으로 종이컵을 하나 집어서는 내 앞에 두고 오뎅 국물까지 퍼준다. 간장도 사장님께 종이컵 윗부분 반을 잘라달라고 부탁해서, 그 종이컵에 따로 담아 내 앞에 놓아준다.
"따뜻한 거 먹고 싶다며? 따뜻할 때 마셔."
아빠도 아니면서 아빠처럼, 내가 먹는 모습 쳐다보면서, 오뎅 국물도, 간장도 챙겨주는 모습이 어른스럽다. 먼저 오뎅을 덥석 집어든 내가 조금 부끄러울 정도로. 최애도 배가 고플 텐데, 나를 먼저 챙겨주는 모습에 이게 뭐라고 또 심장이 쿵쾅거린다. 아빠가 해 줄 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모습인데 말이다.
"아구구, 오물오물 잘 씹어 먹네. 귀엽게."
"너도 얼른 먹어. 그만 쳐다보고. 나 부끄럽단 말야."
"잘 먹는 모습 보니, 자꾸 누가 떠올라서 보기만 해도 흐뭇해."
"누구? 또, 댕댕이?"
"어!"
이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어도 쥘 주먹이 없다. 괜스레, 오뎅한테 화풀이하듯 한입 크게 베어 먹는다.
최애도 이제 먹으려는 지 자기 앞에 오뎅 국물을 한 컵 따라서, 한 손으로 감싸 잡는다. 손도 참 크다. 국물을 마시려나 했는 데, 마시지는 않고 들고만 서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최애도 배가 고플 텐데 하는 생각이 드니 먹여주고 싶다. 손은 하나고, 내 먹던 거 내밀기는 아직도 조금 어색해서, 뜨거운 오뎅을 후후 부는 척 고민을 한다.
"야~야~, 그만 불어. 다 식었어."
그 말하는 입에 나도 모르게 오뎅을 들이밀었다. 눈이 동그래지며, 기분 좋게 넙죽 한입 크게 베어 먹는다.
오뎅을 씹으며,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는다. 이제는 최애 손으로 먹으려나 보다. 그 한입 넣어준 걸로 난 쑥스러워서 애꿎게도 아래 입술을 지그시 문다. 그때, 최애의 손이 내 한쪽 귀를 불쑥 감싼다.
"따뜻하지? 귀가 빨간 게 추워 보여서... 새로 나온 핫팩이야. 하하"
"아, 뭐래? 나 좀 편히 먹자. 너도 편히 먹고."
정말, 얘는 뭐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자꾸 나를 설레게 한다. 최애의 다정에 물들게 한다.
최애의 다정함에 비해 투박하고 무정한 내 말과 행동은 태양에 눈 녹듯이, 속절없이 다정함에 내 무정함이 스르르 녹고 있다. 자꾸만, 최애의 다정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나를 물들인다. 물드는 게 좋으면서도 두렵다. 누군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드라마로 사랑을 너무 먼저 알아버린 걸까? 내 첫사랑도 그렇게 상처가 될까 봐 조금은 조심스럽다.
눈빛은 벌써 다정에 물들었다.최애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좋으면서도, 생각이 쌓이고 감정이 쌓인다. 특히, 감정은 오르락내리락,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왔다 갔다 조절불능 상태다.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제어장치 고장 상태로 내 마음은 생각과 다르게 최애를 향해 빠르게 돌진하고 있는 느낌이다.
오뎅 꼬치 하나를 다 먹으니, 주문한 메뉴들이 하나씩 접시에 담겨서 나왔다. 왼손 사용이 어색할 최애를 위해 내가 먹여주고 싶다. 벌써 이래도 되나 그런 건 모르겠다. 그냥 지금을 살고, 여기를 살뿐이다. 내 감정에 솔직하게. 우린 이제 고3이니까. 감정에 솔직해지기도 부담스러운 시간들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나 하나, 너 하나. 내가 입에 넣어주는 게 좋다고 히죽히죽 거리면, 최애 입으로 가던 음식은 바나나킥이 되어 내 입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마다, 최애의 입은 사나운 맹수가 되어 그 음식을 따라 내 입을 씹어먹기라도 할 듯이 달려들기도 했다. 이 정도 거리는 아슬아슬 위험을 알리는 경계선이 필요하다. 선을 긋고 싶다. 근데, 선을 긋기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정에 물들어 선은 보이지 않는다.
※ 다정한 노래, 유재하 님의 <그대 내 품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