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히 땅거미가 내리고,

-<단편소설> 그 겨울, 열아홉 6

by 해야블라썸

배를 채우고 다음 스케줄을 계획하기 위해 시간을 확인하던 최애(남친의 별칭)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폰에는 어머니라고 저장된 번호로 부재 전화가 20통도 넘게 와 있었다. 남학생들이 그렇게 대거 보충 땡땡이를 쳤으니, 담임 선생님은 이미 각 학생들의 집으로 연락을 취한 모양이다.

"전화부터 먼저 해봐야 되는 거 아니야?" 걱정스러워 조심스레 물었다.

"글쎄, 생각 좀 해보자."

이렇게 심각한 모습은 처음이다. 학원에서 내가 알던 최애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듯하다.


"내가 전화를 걸면, 지금 집으로 가거나, 아니면, 조금 있다가 학원으로 갈 수밖에 없을 꺼란 말야. 어차피, 혼날 건데..."

이미 혼날 각오는 되어 있겠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얼른 들어가서 어머니의 노여움을 풀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참, 근데, 그럼 넌 어떻게 되는데? 넌 아직 부모님 모르시는 거지?"

"어. 아까 담임선생님이 허락해 주셨으니, 그렇지 않을까?"

"그럼, 나의 결정은?"

이라고 힘주어 말하더니, 불쑥 전화의 전원을 꺼버렸다. 여태껏 다정하던 최애의 모습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이 용기에 손뼉 쳐 주며 공범자가 되야 해야 하나, 그러면 안 된다고 이제는 집에 가자고 말리는 반역자가 되야 하나 장단 맞춰 주기가 어렵다.


"오늘은 우리 둘만을 위한 날이야. 만난 지 1년 되는 날이잖어."

최애는 내 손가락이 아프도록 손깍지를 세게 다졌다. 누가 들으면, 1년은 사귄 줄 알겠다. 나와 마주친 첫 번째 날부터 기억하는 친절한 남자와 공식적인 수많은 날들의 기념일도 제대로 챙겨 본 적 없는 무심하고 무던한 여자와의 만남이라니... 불행인가? 다행인가?


이미 학교를 뛰쳐나올 때, 어느 정도는 각오했지만, 최애의 부재중 통화를 보니 함께 용기 내는 게 조금 두려워졌다. 사소한 걱정이 내게 밀려오면, 나는 태연하게 대처 못하고 끙끙거리며 더 크게 걱정하는 스타일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최애가 혼나는 것도 걱정이지만, 모범생에게 여지껏 없었을 땡땡이 한 번이 여자친구 때문이라고 혹여나 원망을 사게 되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까지 밀려왔다. 걱정 없이 놀기 좋아해야 할 열아홉 살의 나이에 말이다.


그래도, 폰을 끄는 최애의 대담한 행동에 나도 용기를 내서 달라지고 싶다. 우리 처음 만난 지 1년 되는 날이라고 상당한 의미를 두고 있는 최애를 위해서. 그리고 인생 19년 차 살면서 별다른 기념일을 챙겨보지 못한 나를 위해서. 나에게도 그 의미가 그리 싫지 않기에. 아니, 앞으로 수많은 기념일을 챙긴다 하더라도 우리 커플에게 이 기념일은 단 한 번 뿐이기에. 이번만은 최애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다. 이런 소소한 기념일들이 모여서 나와 최애의 행복이 될 테니까. 미래의 어느 지루한 날, 달콤했던 오늘을 추억하며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려고 노력하며 살게 할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당장 오늘 밤 집에서 맞이하게 될 고난과 내일의 고난은 다 잊고서, 지금 이 순간만 있는 듯, 내일이 없는 듯 오늘을 보내고 싶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기억할 스티커 사진도 찍고, 오락실에 들어가서 오토바이도 타고 자동차 경주도 했다. 코인노래방 부스 좁은 공간에 들어가서는 사랑한다고 행복하다고 목청 높여 노래도 불렀다. 밝고 환한 포켓볼 당구장에 들어가서는 최애한테서 포켓볼 룰이며 자세를 배우고 몇 게임도 즐겼다.


게임 중 잘 치고 싶은 욕심에 교복치마가 올라가는 줄도 모르고 허리를 깊숙이 숙이면, 최애는 놀라서 내 뒤를 막아섰다.

"그렇게 자세 잡아도 별로 달라지는 거 없으니까, 대충 치면 안 될까?"

혹시라도, 내 속살이 너무 많이 노출될까 봐 내가 무신경한 부분에 나보다 최애가 더 안달내며 신경 쓴다. 그래도, 승부욕에 불타는 나는 짧은 팔을 뻗어 포켓볼 다이 위에 엎어지 듯, 나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자세를 잡게 되곤 했다. 그럴 때면, 최애가 더 긴장했다.


긴장할 때면, 최애는 그림자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뒤에 딱 붙어서, 나와 똑같은 자세로 내 손을 잡아 각도를 맞춰 큐대를 튕겨주기까지 했다. 우리 둘의 승부를 위한 게임이라고 강조를 해도, 최애는 승부욕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한 번씩 이런 자세를 하고 나면, 백허그라도 한 듯, 우린 또 서로 부끄러워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얼른 그다음 동작을 취하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즐거움의 시계와 고통의 시계는 시계추의 길이가 다르다. 그래서, 같은 분량의 시간이라도 그 길이가 늘 다르게 느껴진다. 문제는 즐거움의 시계추 길이는 짧고, 고통의 시계추 길이는 길다는 것뿐.


즐겁게 놀다 보니 어느새, 검은색 땅거미가 도화지에 물감 퍼지듯 도심의 현란한 네온사인 사이로 퍼지고 있었다. 깜깜한 밤이 되려고 하지만, 네온사인이 땅거미를 빨아들인 듯, 어둠과 불빛들이 오묘하게 섞여서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것이 불안 속에도 행복한 지금의 우리와 닮아 있었다.


봉인해제되었던 손깍지가 다시 체결되고, 우리는 우리를 닮은 거리 속을 헤매었다. 쇼윈도에 진열된 옷이며, 신발이며, 각종 액세서리를 구경하는 데도 이제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상대를 위한 것을 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서로가 어떤 옷을 입으면 이쁘고 멋있을지, 우리 커플 아이템은 가방이 좋을지 신발이 좋을지, 각자의 개인주의적인 생각들은 사라지고, 모든 시선과 생각들이 서로와 우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내가 이토록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이토록 누군가를 향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본 적 있었던가? 여태껏, 나만을 향해 있던 생각과 시선이 나를 벗어나 타인을 위한 생각과 시선으로까지 확장된다는 것. 그것은 삶 속의 전율이고, 환희이고, 행복이다.


도심의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에 이르러 우리의 발걸음이 멈춘다. 공원의 벤치에는 우리와 같은 연인들이 각각의 벤치를 차지하고 있다. 친구와 같이 왔을 땐, 연인들 사이에서 벤치에 오래 앉아있기가 민망했었는 데, 오늘은 오래 앉아있어도 될 것 같다.


평소와 달리 아침부터 많이 움직이고 걸어서 벤치에 앉으니 피곤이 몰려온다. 나도 나지만, 내 앞에서 태연한 척, 의젓한 척, 대담한 척했을 최애는 더 피곤할 것이다. 이제는 나란히 앉아 어깨가 닿을까, 무릎이 부딪힐까가 전혀 걱정되지도,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최애도 이제는 긴장이 풀린 듯하다. 나의 조그만 어깨 위로 최애의 머리가 자연스레 쓰윽 넘어온다. 조금 무거운 것 같기는 하지만, 참을 만하다. 아니, 참고 싶다. 나도 살포시 내 머리를 최애 머리 위에 포개며 속삭여본다.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 나 지금 많이 행복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거 같아."

최애의 볼을 살짝 쓰다듬어 준다. 최애는 대답 없이 눈을 스르르 감는다.



공원의 가로등이 우리의 벤치를 비추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껏 알았던 지식이, 세상이 다 다르게 보인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고 배웠는 데, 그 지동설에 두 가지 가설을 더 추가해야 될 거 같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세상은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그리고, 그 사랑의 중심에는 우리가 있다고.


이제껏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던 내 삶에, 나 그리고 나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있는 최애가 주인공이 된 이 밤. 우리를 비추는 가로등이, 거리의 네온사인이, 밤하늘의 별빛이, 우리 주변의 벤치 속 연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눈동자가, 너와 나, 우리가, 모두 반짝이고 있다. 반짝거리는 세상이 참 아름답다.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 하였다
첫사랑이었다


※ 드라마 <도깨비>에 나와서 더 유명해진 시, 공유의 목소리로 감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