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라 서툴지만,

- <단편소설> 그 겨울, 열아홉 7

by 해야블라썸

내 어깨에 기댄 최애(남친의 별칭)는 한동안 눈을 감고서, 이 저녁의 공기를 느끼는 듯했다. 나보다 큼직막한 몸뚱이를 내게 의존하고 있는 모습에 최애의 번뇌가 느껴지는 듯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멍하니 맞은편 가로등 불빛을 보고 있노라니, 그 가로등 밑 벤치에 자리 잡은 연인이 보인다. 우리보다는 나이가 많은 대학생쯤 되는 연인들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뭐 해? 자?"

"어, 피곤해."

"얼른, 일어나. 이제 집에 가자."


혹여나, 맞은 편의 연인들의 모습을 최애가 보고서 딴생각을 품을까 두려워, 자리 이동을 독촉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좋은데..."

영문을 알지 못하는 최애는 눈을 뜰 생각이 없다.

"니 머리 엄청 무거워, 이제 고개 좀 들어."

"어, 그랬어? 댕댕이, 미안."

그제야, 눈을 뜨고 고개를 든다. 맞은편 연인들을 최애는 봤을까?


"춥다아~, 어디 저녁 먹으러 들어갈까?"

이제는 자연스레 최애의 오른손이 내 어깨를 감싼다. 그걸 뿌리치지도 못하는 나. 오히려, 따뜻해서 좋다. 이래서 겨울에는 늑대목도리라고 하는구나 싶다.


"이제, 집 가자. 오늘 놀만큼 많이 놀았잖아."

"..."

최애는 말이 없다. 맞은편 연인들을 보고 있다. 나는 맞은편 연인들이 멈추거나, 우리가 얼른 여길 벗어나거나, 빨리 둘 중 하나를 하고 싶다.


"아직 못해본 것도 많은 것 같은데..."

오늘 처음으로 최애가 음흉하다고 느껴졌다. 포켓볼의 백허그보다도 더 강렬하게.

"뭐래? 오늘 1년 치 놀 거 다 논 거 같은데. 배고파. 편의점이라도 가자"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최애는 내 어깨에 두른 오른팔에 힘을 줘서 내가 일어나지 못하게 누른다. 나는 기어코 일어나려 애쓴다. 몇 초간 둘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침부터 마음 맞춰 잘 놀아놓고, 밤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의견이 다른 순간이다. 최애는 눈을 깜박이며 애원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 자리를 뜨는 게 진심이냐고 묻는 듯 눈에 힘을 주고 눈썹을 씰룩이며 눈으로 묻기도 하였다.


"아, 얼릉 일어나. 배고파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왼손으로 무릎을 한대 치자, 최애가 말을 듣는다.


이제는 손깍지가 아니라, 어깨에 늑대목도리를 두른 여인이 되어 자리를 이동한다. 공원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가자, 늑대목도리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최애는 사나이 울리는 컵라면과 내가 좋아하는 튀김이 든 우동 컵라면, 삼각김밥 2개, 바나나 단지 우유 2개를 골라서 계산을 한다. 알바생이 계산을 하고 있는 데, 최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앗! 이것 추가요."

그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지만, 계산하고 바로 최애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계산해 온 컵라면을 뜯고, 물을 받고, 의자에 앉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린다. 그 사이, 최애는 삼각김밥의 비닐을 뜯어 흐트러진 김을 다시 삼각형 모양이 되도록 이쁘게 정리하여 내게 건네준다. 매너가 좋다. 항상, 나를 먼저 챙겨줌이 좋다. 늘 독립적이던 내가 이런 매너에 익숙해질까 봐 쓸데없는 염려가 나를 앞서 간다. 행복한 순간이면, 왜 자꾸 이렇게 쓸데없는 염려가 나를 휘감는지 모르겠다.


최애는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다. 삼각 김밥을 네 번만에 다 베어 먹는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런 게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느낌인가? 혼자서 잘 먹고 있던 최애는 내 시선을 느끼고는,

"넌, 왜 안 먹어? 그렇게 배고프다고 앙칼지게 굴더니..."

"네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서."

"뭐야? 뜬금 엄마같이. 맞은편에 울 엄마 앉은 줄."

나도 모르게 왼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주먹이 쥐어진다. 나의 다정함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한 대 칠 기세였지만, 최애가 젖가락으로 라면 먹는 모습에 놀라, 갑자기 다급하게 외쳤다.

"뭐야, 너?"

"아, 엄마 같다는 말은 취.소. 미안~"

"그게 아니고, 너, 왼손잡이였어?"

최애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눈치챈 듯, 최애 특유의 두 눈을 찡긋 날린다.


"너, 아까 내가 떡볶이 먹여줄 때 왜 말 안 했어?"

까칠한 말투로 최애의 마음을 취조하기 시작한다.

"너라면 말하겠냐? 너한테 애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최애는 능글맞게 히죽거린다.


아! 정말, 최애가 여우 같아 보이기는 또 처음이다. 어쩐지, 오뎅 국물이든 간장이든 능숙하게 잘 다룬다 싶었는데, 최애가 그린 큰 그림에 휘말린 느낌이다. 약간의 배신감이 들지만, 그래도 귀엽고 사랑스럽고 고맙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정말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린 거라 해도, 나보다도 덩치 큰 아이가 내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렇게 가까워지지 않았나 싶어서 고맙다.


하루를 같이 보내는 데, 최애의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일 년을 같이 보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오늘 하루 만으로는 미처 다 보지 못한 또 다른 모습이 있겠지만, 이젠 그런 미지의 것들이 나에겐 설레임이다.


"이젠, 다 먹었으니, 집에 가자."

"진짜, 가고 싶어?"

"가고 싶어서 가냐? 가야 되니까 가는 거지. 시계를 봐봐."

"..."

최애는 말이 없다. 버스 정류장을 향하여 터벅터벅 힘 빠진 채 걷는다. 다시, 손깍지를 끼고서.


"넌, 몇 번 타야 돼?"

"그냥 같은 거 타고 가면 돼."

"어? 늦었는 데, 안 바래다줘도 돼."

"아냐, 너랑 같은 아파트야."

"어, 진짜? 어쩐지... 나 학원 다닐 때, 니가 내 스토킹 하는 줄 알았잖아.ㅎㅎㅎ."

"아, 정말, 뭐래? 날 어떻게 보고."

이번엔 내가 코를 찡긋했다.

"거 봐. 나 알고 보니 괜찮은 남자지?"

그렇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할 것을 하지 못했다. 이미 내게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서, 뭐라고 말할지 표현을 찾지 못했다. 이제, 내 인생은 최애를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로 나눠질 것 같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최애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껌하나 불쑥 내밀더니, 공원에서처럼 또다시 내 어깨에 머릴 기대었다.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며 세상의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벌써 오늘 하루가 그리워졌다. 이렇게 하루가 저문다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완벽하게 낯설었던 우리가 단 하루 만에 이렇게 어색할 것도 없이 친해져 있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최애의 마음을 모른 채 흘러 보냈던 일 년의 시간이 아깝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하필, 고3이 되려는 이 시점에 이런 달달한 감정들이 몰려오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앞으로도 우리, 오늘처럼 괜찮을까?


버스에서 내리니, 혹여나 주변의 시선들이 신경 쓰여서 손깍지를 풀려하는 데, 최애가 또 놓아주질 않는다.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서려니, 최애는 옆 아파트로 나를 이끈다.

"집에 가야지?"

"아~ 십 분만 더 있다 가자. 아니, 오분만 ~"

"근데, 왜 이 아파트야?"

"너 혹시 신경 쓰일까 봐."

"뭐가?"

"..."

정말, 날 위한 것인지 약간은 의심스러우면서도, 최애의 말도 손도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발길이 이끄는 대로 함께 걸어갔다.


밤 9시가 넘으니, 놀이터에는 노는 아이들 없이 한적했다. 드라마의 흔한 놀이터 연애 장면들을 흉내 내보려고 그네에 앉으려고 하니, 최애가 편하게 벤치에 앉자고 한다. 오늘 하루종일의 어떤 다른 말보다도 별 것도 아닌 그 말에, 이번엔 왠지 묘하게 떨렸다.


그네와 시소, 미끄럼틀과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밤이라는 시간과 한적한 공간, 그리고 우리 둘 뿐이라는 느낌 때문일까? 더욱 심장이 마구마구 뛰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써 눈을 감고, 이번에는 내가 최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살짝 잠이 든 척을 했다.



몇 초, 몇 분이 지났을까? 내 얼굴 위로 밤보다 더 까만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가까워짐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싶어도 눈을 뜰 수가 없다. 껌을 씹느라 오물거리던 입술도 더 이상 오물거릴 수가 없다. 가느다란 떨림과 함께, 나와 같은 껌향기의 따뜻한 다른 입술이 내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둘은 껌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포개어진 입술이 마비된 채로 세상의 시간을 멈췄다. 처음이라 서툴지만...










※ 박화요비의 <당신과의 키스를 세어보아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