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정이라 그래. 달달하다 쓴맛이 느껴지는 건...

-<단편소설 > 그 겨울, 열아홉 8

by 해야블라썸

집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평소와 달리 부모님께 인사도 하지 않고, 살금살금 몰래 집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갔다. 문을 잠그자마자 거울 앞에 서서 내 입술을 가만히 더듬어 보았다.


마취되었다 풀리는 듯, 없던 감각이 찌르르 조금씩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최애(남친의 별칭)녀석. 무섭도록 대담하다. 어느 모습이 최애의 진짜 모습인지 헷갈린다. 학교에서는 전교에 내로라할 만큼 공부 잘하는 모범생의 모습도 최애일 테고, 나와 함께 있을 때 가볍게 장난치고 다정한 말을 건넬 줄 아는 모습도 최애이고, 용기 있게 나를 리드하는 모습도 모두 최애일 것이다. 나는 최애한테 어떤 모습이었을까?


키스도 아닌, 뽀뽀 하나에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다니... 내일부터는 독한 고3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나저나, 최애는 지금 괜찮은 걸까?


최애를 생각하자니, 문득 어릴 적 알약을 처음 삼켰던 날 기억이 떠올랐다. 약의 쓴 맛이 두려워 입에 넣지도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던 그때. 아빠는 그런 내게 이 알약은 달달하다고 아빠 믿고 일단 입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믿고 입안에 넣었는데 정말 쓰지가 않았다. 그 맛이 신기해서 혀로 몇 번 굴려보다가 삼키기 위해서 물을 마셨다.


실패였다. 단맛의 겹이 다 닳은 알약은, 삼키는 순간 목구멍에 딱 걸렸다. 삼키기 위해서 물을 계속 마셨지만, 목구멍에 딱 붙어버린 알약은 목구멍에서 한참 머물러 녹기 시작했다. 쓴맛이 목구멍에서 퍼지다 입안 가득 본래의 쓴맛을 알려주고 나서야 식도를 따라 내려갔다. 목구멍에 걸리니 뱉을 수도 없어, 토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아 삼켰다. 그 후론 알약 삼키는 게 내게는 큰 고역이어서 알약을 먹을 때마다 한참을 망설이게 되었다.


당의정. 알약의 쓴맛을 감추기 위해 발라 놓은 달달함. 하지만, 제때 알약을 삼키지 못해 단맛의 겹이 다 녹아버리면 얄짤없이 쓴맛이 퍼진다. 쓴맛을 감추기 위한 거짓의 달콤함이다.


오늘 우리의 데이트는 이처럼 당의정같은 건 아닐까? 달달한 자유함으로 포장된 일탈. 달달함의 맛이 끝나면 토 나올 정도로 가혹한 현실을 직면케 하는 쓴맛. 형벌과 같은 가혹한 책임이 따를 것이다. 한번 맛보고 나면 겁이 나서, 이후 다시 맛보게 된다면 망설이게 될 쓴맛.

나처럼 부모님께 들키지만 않는다면, 당의정 삼키기는 성공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처럼 쉽게 달달하게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목구멍에 걸리듯 부모님께 들통난 최애는 지금 호되게 쓴맛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맛의 거짓에서 깨어나, 현실의 쓴맛을 깨달은 최애는 오늘처럼 계속 달달할 수 있을까? 행복의 여운 틈새로 불안한 생각을 하는 나란 사람은 정말...


달달함에 취해서기도 하지만, 고3이 된다는 현실감이 밀려와서, 최애가 많이 걱정이 되기도 해서, 아니, 앞으로 나와 최애의 관계가 이대로 잘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하는 쓴 맛의 다양한 생각으로 피곤한 몸에도 밤새 뒤척였다.


잠을 못 잤다고 생각했는 데, 어느새 잠들었는지 '문자왔숑'이라는 알림 소리에 잠이 깼다. 함께 등교하자는 문자다. 함께 등교하자는 걸 보면, 어젯밤 최애는 당의정을 성공적으로 삼킨 것 같다. 지난 밤동안의 고민이 무색하다.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등교할 채비를 했다. 이전보다 거울을 더 들여다보게 된다. 거울을 볼 때마다 입술도 한번 만져보게 된다. 그러다, 나 뭐 하나 싶어서 피식 웃게 된다. 달달함에서 얼른 깨어나야 할 텐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우리 집 라인 현관 입구에 최애가 서서 기다리고 있다. 표정을 보니, 우울해 보이지도 피곤해 보이지도 않는다. 밤새 푹 잘 잔 얼굴이라 안심이 된다.

"부모님께 혼 안 났어?"

"뭐~래? 19년 차 되도록 겨우 이번 한 번 속 썩인 건데. 조금 실망은 하셨지만, 이해해 주시겠대. 날 믿으신대."

"아~ 정말? 휴우, 다행이다. 어제 1년 치 놀 거 다 놀았으니 오늘부터는 열심히. 아~자!"

"하하. 가자."

자연스레 오른손을 내민다.


"아니, 그냥 가자. 학교 가는 길이니까."

"아~ 또, 왜? 어제 이보다 더한 것도 했으면서..."

"야! 맞을래? 앞으로 교복 입는 날에는 접촉 금지!"

"하~, 정말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최애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서, 먼저 출발해 버렸다. 쫄래쫄래 뒤따르던 최애는 어느새 보조를 맞춰 나와 나란히 교문을 통과했다.


교문을 지나 교실이 있는 복도를 걷자니, 우리가 지나는 곳마다 복도가 술렁였다. 최애에게 굳이 그러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우리 반 교실까지 데려다주었다. 평소, 조용한 편이라 인싸(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의 대열에 들지 못했던 나는 오늘 우리 반 인싸가 되었다. 예비 고3의 교실이라고 하기엔, 어제의 사건을 일으킨 나로 인해서 면학분위기가 영 엉망이었다. 나에게 뭔가를 묻고 싶어 하는 반친구들의 눈빛과 수군거림이 있었다.


평소, 점심을 같이 먹던 소영이와 몇몇 친구들이 나를 에워싸며 고양이 같은 눈빛을 하고 묻는다.

"어서 다 말해봐, 어제 잼 있었어? 뭐 다른 별일은 없고?"

"뭘 기대하는 거야? 수업 빠져서 불안하기만 했구먼. 어제 수업들은 거나 좀 보여줘."

"에이~ 아닌 거 같은데. 니 얼굴에 무지 신났음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러지말고, 이야기 좀 해봐."

"무슨? 어제 빠진 거 베껴쓰기도 바쁘다. 얘들아, 얼른 책 좀 보여줘~"

어제 수업한 책을 보여달라는 재촉에 만족한 답을 얻지 못한 소영이와 친구들은 실망감을 가득 품은 뾰로퉁한 얼굴로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0교시가 시작하기 전부터, 일찍 등교를 한 다른 반 학생들은 남자든, 여자든 가릴 것 없이 우리 반 복도 쪽 창문 앞을 서성이며 나를 구경하러 왔다. 담임 선생님의 조회가 끝나고도, 1교시가 끝나고, 2교시, 3교시,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나를 구경하러 온 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보충을 땡땡이치고 최애랑 손을 잡고 뛰쳐나간 일이 이렇게 이슈가 될지는 몰랐다. 최애가 전교에 소문날 정도로 공부를 잘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존재감 1도 없이 조용했던 나 때문일까? 이제는 어딜 가나 나를 알아보는 듯해서 그 시선들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5교시 보충수업이 끝날 무렵,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나의 땡땡이는 담임 선생님께서 허락해 주신 일이라 이렇게 불려 갈 것이라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기에, 학년부장 선생님께 혼날 것을 생각하니 공포가 나를 엄습해 왔다. 최애와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사랑의 알약을 잘 삼켰다고 생각했는 데, 목에 걸릴 것 같다.


찾아간 교무실에는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손님과 이야기 중이셨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서 기다리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짓으로 나를 부르셨다.

"인사하거라. 강준(최애의 이름)이 어머님이셔. 너와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셔서..."라고 말하시며, 자리를 비켜주셨다.


"학생, 미안해. 내가 불쑥 이렇게 찾아와서. 공부해야 할 시간인데..."

"아니에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제 사실, 나 너무 놀라서... 강준이가 학교든 학원이든 한 번도 땡땡이친 적이 없는 아이거든. 사실, 학생도 우리 강준이가 공부 좀 하는 것 알지?"

"아~, 네에"

"어제 더 놀랐던 건, 여자랑 손잡고 뛰쳐나갔다고 해서, 이게 뭔 일인가 싶었어. 그동안 내가 강준이에게 너무 무심했나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강준이가 여학생들한테 인기는 있어도 여태 공부하느라 한 번도 사귄 적은 없었거든."

"아~, 네"

"그런 애가 땡땡이에 내 연락까지 피해서 난 기절할 뻔했어. 그것도 고3이 되려는 이 시점에 말야. 강준이가 이 학교서 공부를 잘한다 해도, 의대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 잠시도 한 눈 팔 겨를이 없는 애거든. 물론, 학생도 공부해야겠지? 서로를 위해 고3 때는 공부만 하면 안 될까? 대학 가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텐데..."

"...."

"우리 강준이 만나자고 연락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고, 혹여나 강준이가 먼저 연락을 한다고 해도 그 연락 무시해 주면 좋겠어. 강준이는 내가 더 신경 써 볼게."

"...."


아주머니께서 틀린 말도 아니고 맞는 말만 친절하게 하셨는 데도 그 말이 내게는 극악무도하게 들렸다. 아들에게는 믿는다고 하셨다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는 나의 무엇을 못 믿어서 초면에 이러시는지 엄청 서럽고 화가 났다. 아주머니의 불안한 마음도 이해가 되지만, 그 불안한 마음을 어린 나에게 어른스럽게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잔인하게 느껴졌다. 한 순간 순진한 최애를 꼬신 나쁜 년이 된 느낌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미안함도 잘못을 뉘우침도 없는 눈물 따윈 흘리고 싶지 않았는 데, 내가 아직 어린 건지, 어리숙한 건지, 한마디 대꾸를 못하고 눈물로만 답하고 있었다. 열아홉이 되어 처음 맛보는 아픔. 열아홉이 느끼는 쓴맛이었다.

"아~ 학생, 내가 학생을 울리려고 그런 건 아닌데.... 미안해. 학생도 고3이니까 내 자식 같아서 하는 말이었어. 오해는 하지 말고..."


흐르던 눈물이 주체가 되지 않아 결국 꺽꺽 소리까지 내며 울고 말았다. 최애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하시며, 손수건을 챙겨 내 눈물이 멈출 때까지 등을 토닥여주셨다. 눈물을 쉽게 멈출 수 없었던 나는 7교시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복도가 한산해져서야 다른 아이들의 눈을 피해 화장실로 뛰어가서, 눈물을 씻어냈다.


사랑의 알약. 역시나, 당의정이다. 그 알약을 삼키지 않고 그 달달함에 취해 있으면 어떤 맛이 나는지 확실히 맛보았다. 첫맛은 달아, 그 단맛에 취해있으면 결국 눈물 나게 쓰디쓴 본래의 맛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아직은 사랑이 아니겠지만, 사랑이 되려 했던, 사랑일까 싶은 것을 해보고서야, 이제 다시는 삼키기 망설여질 그런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