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그 겨울, 열아홉 9
6교시 수업 내도록 울어버린 눈은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뻘겋게 충혈되고 퉁퉁 불은 눈두덩이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처음으로 수업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대로 마침종이 울리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곧 7교시 마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내 급식 친구들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반아이들이 내 눈을 보고 나를 에워쌌다.
"어! 이사도라 학년부장쌤한테 혼난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냐..."
상상치도 못한 일을 겪은 나는 새로운 경험이라고 친구들에게 흥분하며 설명할 힘도, 재벌을 사랑한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이별을 종용받았다고 성토하며 화낼 힘도 없었다.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현재의 내가 너무 비참하고 처량해서 교실 이 공간도 얼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때,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너 남친 온 거 같은데?"
더더욱 숨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여기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조용히 가방을 챙기고 교실밖으로 나오니, 우리 반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한 최애(남친의 별칭)는 무슨 일인지 내게 물으려 하다가, 내 눈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이 분위기의 주인공이 너였어? 무슨 일이야?"
최애에게 무엇을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단어 하나 고를 수가 없었다. 아니,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 그게...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그날이라서 그래."
나는 새하얀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이런 날은 몸도 몸이지만 기분이 몹시 안 좋으니까, 오늘은 우리 따로 가자."
"아~ 또, 왜? 그러니까, 내가 더 필요한 거지. 내가 바래다줄게. 업을까?"
최애는 업는 시늉을 하다가 내한테 또 한 대를 맞았다. 다른 때와 달리 힘이 다 빠져버린 내 주먹으로.
"어, 진짜 많이 아픈가 보네. 방금 뭐 한 거임? 간지럽힌 것도 아니고..."
또, 두 눈을 찡긋하더니, 내 한쪽 팔과 어깨를 부축하며 잡는다. 두 눈은 또 왜 찡긋해서 내 마음 흔들리게 하는가? 이 팔은 뿌리쳐야 하는 가, 마는 가? 방금 전 어머님 만난 이야기는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최애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많은 고민 속에 길을 걸었다. 내가 걷는 건지, 최애가 나를 들고 가는 건지 생각을 못할 정도로. 신호등이 빨간 불인 지, 파란 불인 지 구별도 못하는 상태로.
최애의 이끌림에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멈췄다. 약국이었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 봐. 약 하나 사고."
영혼이 털린 듯,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나는 멍하니 약국 긴 의자에 잠시 앉았다.
"무슨 약, 찾으세요?"
"생ㄹ... 아, 생이빨이 갑자기 빠져서 진통제 하나 주세요."
최애는 부끄러운 지 생리통이라는 말을 하려다 멈칫하며, 말을 돌렸다.
"예? 생이빨이 왜? 어디 한번 볼까요?"
"아뇨. 치과 갈 거니까, 얼른 진통제 하나 주세요."
이 와중에, 생리라는 단어 하나를 말하는 데도 말을 더듬고 부끄러워하는 최애가 귀엽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귀여움에서, 아니, 최애만의 저 매력에서 이제는 빠져나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면, 최애 어머니 말씀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나도 최애도 서로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는 시간을 우리는 살고 있다.
다정도 병인 최애는 그런 내 속마음도 모른 채, 정수기에서 물까지 받아왔다.
"댕댕이, 아~하고 입 벌려봐. 약 먹고, 얼른 나아야지."
나는 거짓말이 들킬까 봐, 넙죽 약을 받아먹고, 물을 마셨다. 진통제 한 알이 아픈 마음까지 진정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나, 집으로 바로 갈 거야."
"그래, 그래야지. 조심히, 일어서 봐."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최애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며, 살뜰하게 나를 챙겼다. 다시, 나를 부축하여 우리 집 아파트 현관에 이르렀다.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서도 가지 않았다. 혹여나 싶어, 집에 들어가서 베란다 아래쪽을 바라보니, 최애가 우리 집 베란다를 향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손을 흔들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최애는 발걸음을 돌렸다.
텅 빈 집의 차가운 공기가 나를 더 서글프게 만드는 것 같아서, 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몸을 다시 일으킬 힘도 없이 그대로 잠들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눈을 뜬 나는 최애와 같이 등교하지 않기 위해서, 평상시보다 30분 일찍 등교했다. 아직도, 눈의 붓기가 조금 덜 가신 듯, 눈두덩이 조금 무거웠다. 1등으로 등교한 교실의 아침 공기는 약간 쌀쌀했지만, 차분한 공기는 생각이 정리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만에 하나 최애가 원하는 대학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최애 엄마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다는 최악의 생각으로 시작해서, 최애도 최애지만 내 목표를 위해서 나도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최선의 생각에 이르렀다. 책을 펴고 공부하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면, 다시 책내용이 눈에 들어올 거라고 믿으며...
반친구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들어와 자리를 채울 때, 소영이가 등교했다.
"너, 그거 사실이야?"
"뭐가?"
"어제, 너,,, 남친 엄마한테 존나 까였다며?"
"누가 그래?"
"학교에 비밀이 어딨냐? 이미 소문 다 났어. 학원까지 소문 다 났다니까. 아마, 니 남친까지도 그 소문 들었나 봐... 어제 학원 수업 중에 바로 뛰쳐나갔다던데..."
"....."
"너, 정말 괜찮어?"
"안 괜찮으면?"
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 말을 맺지 못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 내가 안쓰러운지, 소영이는 등을 토닥여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애써 담담하려 눈물을 닦고 다시 책을 보며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책의 글씨가 보이기보다는 종이보다도 더 진하고, 글씨보다도 더 큰 눈물 자국만 보였다.
머리로는 최애와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으로는 자꾸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 따로, 마음 따로. 고장 난 신호등처럼 생각과 정반대 되는 마음이 동시에 깜빡거렸다. 0교시가 끝나면 올까? 1교시가 끝나면 올까? 나는 최애와 헤어질 생각을 하면서, 마음으로는 이렇게 자꾸만 기다렸다. 그런데,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최애는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5교시 수업이 시작되고, 졸음이 몰려오는 시간. 반의 몇몇은 이미 잠에 취해 책상 위에 엎어졌고, 몇몇은 졸음과 전쟁 중이었으며, 나는 졸음이라는 핑계를 이용하여 세수하고 오겠다고 선생님께 허락을 받았다. 도저히, 최애가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제 무심했던 나의 태도와는 달리 다정다감했던 최애가 학원을 뛰쳐나갔다면서, 갑자기 왜 코빼기도 안 내미는지 궁금했다. 어제 사건을 알게 되었다면, 제일 먼저 나한테로 달려올 것만 같은 그 녀석이...
최애의 교실과 화장실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화장실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최애의 교실로 직행했다. 최애의 교실 앞에서 몰래 최애 자리 쪽을 훔쳐보았다. 최애가 보이지 않았다. 숨어서 봐서 잘 볼 수 없나 싶어, 미어캣처럼 목을 쭈욱 빼고 다시 쳐다보았다. 책상 위도, 옆도, 가방이나 책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분명, 최애가 보이지 않았다.
지루한 목요일. 최애가 학교를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