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듯,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단편소설> 그 겨울, 열아홉 마지막화
최애(남친의 별칭)는 그다음 날, 금요일이 되어도, 토요일이 되어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 연속 3일.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걱정되고 궁금했지만, 최애의 어머니가 신경 쓰겠다고 하신 그 말씀이 떠올라서 쉽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리움이 눈물이 되고, 걱정이 한숨이 되어 눈물만 흘리고 한숨만 쉴 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런 연락 없는 것을 보니 최애에게 뭔가 단단히 사달이 난 듯했다. 그 사달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연락 한번 안 주는 최애가 심히 야속하고 밉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물러서서 끝낼 만남이었으면, 왜 사귀자고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난 지 일 년이라면서 의미를 두고, 내 가슴 콩닥거리게 만드는 오글거리는 멘트와 다정다감하게 나를 먼저 챙겨주던 그 모습들은 나와 뽀뽀 한번 해 보기 위한 수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생겼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짧은 사귐에 대한 괘씸함과 최애 진심에 대한 의심의 마음이 커졌다.
이렇게 잊어야 하는 가보다 생각했다. 기억하겠다고 수십 번을 쓰면서 외운 영어단어는 잊어도 아쉬움 하나, 아픔 하나 없었는 데, 잊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잊는 것은 나를 많이 아프게 했다. 최애도 아픈 건지 염려스러우면서도 미워지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다. 단 한번 데이트하고 10여 일간의 사랑으로 끝나버린 우리의 연애는 소나기처럼 내리던 빗방울이 갑자기 찬바람을 만나면 얼어서 떨어지는 모질고도 추운 겨울날의 싸라기눈과도 같았다.
일주일 전의 내 주말은 최애와의 전화통화로 심심할 틈이 없었는 데, 이번 주말은 이불속에서 연락 없는 연락을 기다리며 지난한 주말을 보냈다.
이제 곧 익숙해질 것이다. 최애를 만나면 얼마나 만났다고? 이렇게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단 하루의 데이트는 1년 이상을 사귄 느낌이었고, 10여 일 간 나눴던 우리의 이야기들은 10년 간 알던 사람과 나눈 대화 같았다. 하나씩 최애와 함께 했던 것들을 잊어야 되는데, 아직은 시간이 약이 되지 못했다.
월요일, 보충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나는 교문 앞에 서 계시던 최애 어머니와 다시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 하나, 그냥 지나가야 하나, 것도 아니면 다시 교실로 발걸음을 돌려야 하나, 그 순간의 찰나가 너무 고민스러웠다. 나를 기다리신 듯, 최애 어머니는 다급하게 나의 손을 잡아 이끄시며 먼저 아는 척을 하셨다.
"예진이? 예진이 맞지? 또 내가 이렇게 염치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지난번 일은 내가 너무 잘못한 거 같아서... 잠깐 내 이야기 좀 들어줄 수 있어?"
"..."
나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머니가 찾아오신 이유도 현재 최애의 상황도 이해하고, 미운 마음도 원망스런 마음도 털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
"강준이가 벌써 5일째 문 걸어 잠그고 나오지를 않아. 밥도 굶어가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 데, 부모랑은 대화할 맘이 없는 거 같아. 그러다가 잘못될까 봐 너무 걱정이 돼서..."
어머니는 말씀하시며 살짝 눈물을 훔치셨다. 며칠 전과는 다른 태도 변화가 느껴졌다.
"그런, 강준이를 보고 있노라니, 내 아들 위한답시고 어른씩이나 돼서 아직은 어린 너한테 내가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알겠더라... 정말 미안해."
어머니의 반성에 눈치 없는 내 눈물이 눈꺼풀 위로 차올랐다.
"사실, 최근에 강준이 진학 문제로 우리 부부랑 의견다툼이 좀 있었어. 동물을 좋아하는 강준이는 수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거든. 근데, 그러기엔 성적이 너무 아까운 거 같아서 우리가 욕심을 좀 부렸어. 의대가라고..."
나는 눈만 껌뻑일 뿐, 가만히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 땡땡이를 쳤다는 연락을 처음 받았을 때는 그거에 대한 반항으로 생각했어. 근데, 방문 걸어 잠그기 전 그러더라고, 이제는 공부든 연애든 자기가 결정하고 싶다고...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라고... 이 나이 되도록 부모 맘대로 결정하고 좌지우지하면, 자기는 삶의 주체가 아닌 거 같아서 너무 초라해진다고. 더군다나 내가 학교 찾아온 걸 알고선 엄청 화를 냈어. 하다 하다, 남의 자식한테까지 멋대로 구냐고... 들어보니 틀린 말 하나 없더라고. 품 안의 자식인 줄 알았는 데, 그만큼 커버린 걸 내가 미처 몰랐던 거 야. 그리고, 예진이한테도 어른이랍시고 내 생각만 옳은 양 말한 거 같아서 너무 미안하고..."
"그런데, 이렇게 사과하신들 뭐가 달라져요? 강준이는 모를 텐데..."
"그렇지? 예진아, 시간 되면 지금 우리 집 가서, 강준이 한번 만나주면 안 될까?"
어머니의 진심 어린 이야기에 화나고, 밉고, 원망스러웠던 마음들이 하나씩 녹아내렸다. 집에 같이 가자는 말은 최애를 위한 구조요청이겠지만, 내게는 수일간 최애를 볼 수 없었던 나를 위한 구호활동과도 같았다. 최애의 어머니와는 아직은 너무 어색한 사이지만, 최애를 모른척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최애가 보고픈 나를 위해서라도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였다.
최애의 집을 향해 가는 동안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다. 나에 대한 오해(남자 홀리는 나쁜 년)로 시작해서 오해가 풀리게 된 경위와 내가 모르는 최애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 주시면서, 나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많이 노력하셨다. 최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최애에 대한 미움과 원망도 사그라들었다. 나 때문에 단식투쟁까지 했다는 사실은 내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고, 자신의 엄마를 나처럼 어린 여자한테 사과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최애가 여리지만은 않은 그만큼 강단 있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최애의 집 거실에 들어서자, 어머니께서는 급히 최애 방문 앞에 서서 노크하시며 말씀하셨다.
"강준아, 제발 문 좀 열어봐. 제발! 엄마가 예진이한테 사과도 했고, 여기 예진이도 같이 와 있어. 문 좀 열어 봐."
그래도, 빗장을 걸어둔 듯 단단하게 잠긴 문은 꿈쩍도 안 했다. 5일째 밥을 안 먹고 있다는 최애가 쓰러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내 마음은 다급해졌다.
"강준아, 내 목소리 들려? 어머님 말씀이 사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활짝 열리고, 최애가 뛰쳐나와 나를 화악 부둥켜안았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시며, 자리를 비켜주셨다. 그렇게 우리 둘은 꼬옥 껴안은 채로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열아홉.
아직도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한 어리기만 한 나이. 하지만, 부모의 간섭 없이 내가 하고픈대로 결정하고 싶은 나이. 경제적으로는 부모의 보호아래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 보호를 벗어나 서서히 독립하고 싶어지는 나이. 현실을 계산하기보다는 원하는 꿈을 그릴 줄 아는 나이. 부족하고 서툴러도 해보고 싶은게 많은 나이. 아직도 어린이처럼 울만큼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이 단단해져 가는 나이. 아직 사랑이 서툴러 눈물을 흘리지만, 그 눈물 속에 풋풋하던 사랑이 여물어 가는 나이.
열아홉은 그런 나이였다.
어머니는 5일 만에 빗장을 연 최애와 나를 위해 이른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하셨고, 울음을 그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너 만났다는 소문을 듣고서, 너무 미안하긴 한데, 연락하면 네가 끝이라고 할까봐 너한테 연락을 할 수가 없었어.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요 며칠 아주 지옥이었어."
"바보. 그래도 했어야지. 난, 또, 딴생각할 뻔했잖아. 뭐가 그리 미안해서..."
"전부, 내 탓이잖아. 너 좋다고 고3이 되는데도 사귀자고 한 것도 나고, 땡땡이치자고 한 것도 나고, 울 엄마가 너 오해하게 만든 것도, 그래서 네가 운 것도, 학교에 창피한 소문난 것도.... 무엇보다 너는 그리 힘든데, 널 지켜주지도 못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현재 무능한 내 모습이 싫고, 너한텐 엄청 미안하고...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차라리 공식 있는 수학 문제면 좋겠다 싶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도 맘대로 선택하고 만날 수 없는 삶이라면, 내 인생은 또 뭔가 싶고... 여튼, 좋아하는 여자나 울리고선 해결방법 찾는데 도움도 안되는 공부가 무슨 소용있나 싶기도 하고... 결국, 답은 너라는 걸 알겠는데, 이 상황에 나도 염치가 있지,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 상황에서 너한테 연락을 할 수가 없었어. 근데, 이렇게 먼저 날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에공, 고새 많이 컸네?"
"뭐래? 댕댕이 너야말로 이제 힘나나 보다. 그때 약국에서는 다 죽어가더니..."
"사실, 너 보니까 이제 나도 조금 숨 쉬어져. 뻔한 상황에서 연락이 끊기니 이게 끝인가 싶어서 조금, 아니, 숨 쉬는 것조차 아팠어."
"미안해, 요 며칠 아프게 했던 거 내가 전부 빚이라고 생각하고 다 갚을 게."
"그래. 꼭 갚아야 돼. 365일 할부로."
우리가 웃고 떠드는 사이, 저녁 상 준비가 벌써 다 되었다. 최애를 위해서는 죽이 준비되었고, 나를 위해서는 따뜻한 가정식이 차려져 있었다.
"예진아,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맛나게 먹어. 앞으로 종종 놀러 와도 되고... 자아,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굳이 안 바래다줘도 된다고 만류했음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여위고 파리한 얼굴로 최애는 나를 따라나섰다. 연락 안 되던 5일을 5년처럼 보냈기에, 사실은 나도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자연스레 우리의 발걸음은 옆아파트의 놀이터를 향하고 있었다. 손깍지를 꼭 끼고서...
어둠으로 가려져서 불빛만 내려앉은 거리가 다시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반듯한 사각형 놀이터의 모서리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도 아름답고, 그런 불빛들 사이로 보이는 초췌한 최애의 옆모습조차도 아름답게 보였다. 5일을 5년처럼 보낸, 간절하고 애틋한 우리 사이에는 할 말이 많아도, 수많은 언어가 필요 없었다. 그 많은 말들은 하나의 몸짓으로도 충분히 전달되니까...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어린 듯,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열하고도 아홉.
열아홉.
세찬 바람 속에서 풋사랑이 여물어 단단해져 가던 계절, 그 겨울.
열~아홉.
그동안 부족한 이야기에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 주신 여러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겨울, 열아홉은 여기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