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단편소설> 그 겨울, 열아홉 4

by 해야블라썸

잘 모를 때는 말없이 조용한 성격으로만 보이던 내 최애(남친의 별칭)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를 주도했다. 마치, 몇 년간 말 못 하고 지내다가 방언 터진 것처럼. 그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말하고 싶어서 어찌 참고 살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니, 외로웠을 그가 왠지 짠하면서 앞으로 내가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내 스스로 나도 모르게 최애의 댕댕이로 변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착한 영화관에는 조조타임임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입시 전선에 내동댕이 쳐진 우리에게 최신 영화 관련 정보가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 정보 없이 나왔기에 무엇을 볼까 영화포스터를 하나씩 둘러보며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최애에게도 분명 취향이란 게 있을 것이고, 귀한 시간을 낸 만큼 자기 취향 따라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을 터인데, 그 선택권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선택권을 넘겨받았다고 해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기는 싫었다. 첫 데이트니까, 이젠 혼자가 아닌 둘이니까, 뭔가 우리 둘 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올만한 영화를 고르고 싶었다. 아직 어리다면 어리지만, 연애는 어른스럽게 해 보고픈 마음도 있었다. 상대를 배려하면서... 평생 잊히지 않도록. 평생 잊히지 않음이 나중에 후회가 될까? 후회될 일 안 만들면 되지 뭐. 지금 뛰고 있는 심장만으로도 벅차서 단순해지려 한다.


찬찬히,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하얀 눈 내리는 배경의 이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러브 레터>. 일본 영화다. 포스터의 하얀 배경처럼 영화가 한없이 잔잔할 것 같다. 자칫하면 졸다가 나오는 거 아냐? 아니, 눈 내리는 배경이니까 사랑의 폭풍우라도 몰아치는 걸까? 포스터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표정이 급심각해지자, 최애가 쓰윽 내 얼굴을 한번 훑어보더니, 입을 뗀다.


"이거, 보고 싶은 거야? 나랑 통했네. 나도 오늘은 왠지 이 영화가 땡겨."

"꺄~악, 정말? 우리 취향도 같은 거야?"

"글쎄? 내 취향은 넌데?"

이렇게 능청스러울 수가? 또, 갑자기 훅!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하지만, 참 어렵다. 이렇게 표현을 잘하는 애였나? 다시 한번,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 연신 빙그레 웃고 있는 최애. 난 얼마큼 내 마음을 표현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 남자사람친구의 존재조차 없다가 시작된 연애는 달달하니 좋으면서도 내 마음의 한도가 얼만큼인지, 내 표현의 한도는 얼만큼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 조금 혼란스럽다. 연애를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다면, 국영수 학원보다 더 시급하게 등록해야 될 거 같다.


줄을 서서, 티켓 발매를 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대화는 끊이지 않는다.

"너 오늘 엄카 못 쓰는 거 아냐? 그럼, 땡땡이친 거 다 들킬 텐데..."

"그럴 줄 알고, 오늘은 비상금 좀 털어 왔어.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지. "

"비상금 터는데, 책은 왜 읽어?"

"아, 어릴 적에 세뱃돈 받거나 용돈 생기면 엄마한테 맡기잖아. 그럼, 우리 엄마는 그 돈을 내가 잘 안 읽는 책 속에 숨겨두셨어. 것두 지폐 한 장씩."

"우와, 어머니 독서교육법이 독특하시다."

"그래서, 내가 돈이 필요할 때면, 잘 안 읽던 책을 읽었지, 그러면 거기서 만 원짜리 지폐가 한 장씩 나오곤 해. 그게 또 은근 짜릿하더라. 금을 캐는 것처럼. 그러다, 책을 사랑하게 됐어."

"ㅎㅎ, 그래서 오늘의 너가 됐구나. 땡땡이 비용까지 풍족한 현금 보유자."

"어? 지금, 이건 욕이지? 맞지? 칭찬 아니지?"

"난 그 돈에 빌붙어 지금을 즐기고 있는 데, 뭘. 아니야. 이렇게 잘 커줘서 무지 고맙다는 말이야. 참 잘했어요. 우쭈쭈~"

나도 모르게 우쭈쭈 하면서 최애의 엉덩이를 톡톡톡 쳤다. 최애가 깜짝 놀란 눈치다. 그제서야, 나도 모르게 민감한 부위에 자연스레 터치한 나의 대담함에 나 역시 놀랐다.


최애가 또 귀에다가 속살거린다.

"방금 나 엄청 놀랐어. 그리고, 너무 흥분됐어. 앞으로도 많이 이래 줘."

기가 막혀 얼굴을 쳐다보니 두 눈을 찡긋한다. 헉~ 뭐지? 조금 변태스러운 면도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제발 귓속말 안 했으면 좋겠다. 귀가 자꾸 마비되는 듯 저려온다. 그 찌리리함이 이번에는 살짝 몸 쪽으로 퍼지는 느낌이다.


나도 모르게 몸을 살짝 부르르 떨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최애집 댕댕이 같아 보였을 까? 최애는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며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표를 끊고 나니, 영화 시작 전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아침은 먹고 나왔어?" 최애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에 다정이 담겨있다.

"아침을 먹고 다녀?"

"응.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배고프지 않어? 학교 올 시간까지 시간도 많이 남고..."

"시간이 어찌 많이 남아? 난 시간이 없어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는 걸. 대체 몇 시에 일어나는 거야?"

"음~ 좀 이른 시간인가? 난 다섯 시."

헉~ 완전 범생이다. 어른들이 입에 닳도록 칭찬하는 완전 아침형 인간이다. 올빼미 같은 나와는 완전 정반대 라이프스타일의 최애. 이대로 우리 연애 괜찮을 까? 연애할 틈도 없을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최애는 자기 돈을 씀에도 내 취향을 물어 내 취향의 팝콘과 음료를 산다. 달달한 캐러멜 팝콘에 콜라. 단 것은 전혀 못 먹을 것처럼 생긴 범생이에게 단 것만 먹자고 해도 되는지 조금은 염려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니 최애의 취향 따윈 굳이 묻지 않고 내 좋아하는 것으로 다 하긴 하는데, 그래도 최애의 취향이 궁금하긴 하다. 그 궁금증을 알려고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꺼내면, 조절이 안 되어 마음 전체가 다 꺼내질 거 같다. 마음은 아껴서 조금씩 천천히 꺼내야겠다. 억누르는 게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불이 꺼지자, 잡고 있는 손이 조금 간질간질하기도 피곤하기도 하다. 손을 놓으려니 최애가 더 세게 손가락에 힘주며 깍지를 풀지를 않는다. 손잡는 강도만큼 애정이 느껴진다. 이렇게나 내가 좋다는 말인가? 이런 마음이란 건 유효기간이 언제까지일까? 급 궁금해졌다.


흑백영화처럼 회색빛 배경의 묘지 장면에서 시작된 영화는 흑백인 듯 칼라인 듯 잔잔하게 진행된다. 조용히 숨죽여 보고 있자니, 내 반응이 궁금한지, 아님 그 잠깐에도 내 얼굴이 보고 싶은 건지 곁눈으로 자꾸 흘금흘금 나를 쳐다본다. 쳐다봐주는 게 무안해서 그때마다 팝콘을 최애 입에 넣어주며 영화에 집중하려 애썼다. 혹여나, 찐한 키스신이 나오면 그때 내 표정관리는 어찌해야 되나 조금은 신경 쓰이기도 한데, 자꾸만 흘끔거리니, 팝콘이 다 떨어지면 어쩌나 싶어 팝콘 한 알씩 새모이 주듯 한다.


다행히도, 이 영화에는 주인공 남녀의 찐한 키스신이 없다. 한번 나오는 키스 장면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뜨거운 키스라 할 것이 못 된다. 키스신 없이 무사히 끝난다. 내게 사랑의 유효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면서. 첫사랑의 위력이 두 번째 여자를 만나면서도 기억할 정도란 말이지? 근데, 난, 최애의 처음은 맞는 건가? 또 궁금해졌다.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궁금한 게 많아진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간접적으로 겪는 사랑이란 게 아프기도 절절하기도 애틋하기도 해서, 가슴 먹먹했다. 그런데도, 아쉽지 않을 사랑을 꼭 한 번은 해보고 싶다고 생각될 만큼 아름다웠다. 영화의 여운에 넋을 잃고 앉아 있자니, 최애가 또 장난을 걸어온다.

"오겡끼데쓰까?"

"아따시와 겡끼데쓰."

그새 일어 하나를 익혔다. 사람들이 거의 다 영화관을 빠져나가고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가 너무 좋았구나?"

"...."

"어? 너 우는 거야?"

"야! 너! 웃기지 마!"

"아니, 영화 잘 보고 왜 이렇게 까칠해지셨을까?"

최애는 벌써 내 말의 묘한 억양을 잘 알아차리는 거 같다. 내가 최애의 첫사랑인지 너무 궁금한 데, 에둘러 뭐라고 물을 지 몰라서 순간 내 말투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나왔다.


"나 혹시 누구 닮은 거야?

"응. 갑자기? 음~~~, 그러고 보면 닮긴 닮았지."

"누구?" 조금은 목소리가 떨렸다.

"아하하, 왜? 내 첫사랑이 궁금해서?"

"몰라, 그냥..."

"넌,,,, 내 댕댕이를 닮았~지?"

"뭐어?"

주먹을 꽈악 쥐고 등짝을 한 대 때렸다.

"아야야, 넌 백 번째야."

"뭐어?" 주먹을 더욱 꽈악 쥐었다.

"99명의 여자들이 나 좋다고 그렇게 따라다녔었는데... 넌 백 번째로 알게 된 여자이면서, 내가 처음으로 관심 갖게 된 사.람."

처음이란 단어 때문에 주먹을 스르르 풀었다.

"댕댕이 닮아서?"

"그렇지. 하하" 또 주먹이 날아올까 봐 몸을 피한다.


"너도 수학 문제집 뒤에 내 얼굴 그려 놓았어?"

"하하. 문제집에 네 얼굴 그릴 만한 공간이 어딨냐? 그래서..."

"그래서? 왜 말을 하다 말어?"

"그래서, 내 마음에 네 모습 전체를 저장해 뒀어. 개체보호까지 해서.."

"어? 약간 소름이다. 왠지, 좀 변태스럽게 들려. 변~태."

괜히 좋으면서 내 마음 감추기용으로 또다시 주먹을 쥐고 최애의 명치를 툭툭 쳤다. 최애는 아파하기는커녕 간지러워하는 듯하다.


결국, 최애의 농담 어린 말에 최애의 첫사랑 찾기 미션을 성공한 건지 아닌지 조금은 아리송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 가? 지금 이 순간 둘이서 느끼는 이 감정이 중요하지. 그냥, 내가 처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처럼 뒤늦게 사랑을 깨닫지도, 와타나베 히로코처럼 사랑을 의심하며 캐내지도 않으련다. 지금의 감정을 믿으며, 지금 우리가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면 된다. 처음이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 아련히 첫사랑의 추억에 잠기신다면, 정승환의 <러브레터>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