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부터 내 최애는...

- <단편소설> 그 겨울, 열아홉 3

by 해야블라썸

"너, 그거 알아?"

"뭘?"

"우리가 만난 지 벌써 일 년이란 걸?"

고작 사귄 지 1주일 지났는데, 갑자기 진지해진 남친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조금은 긴장돼서 아무 말이나 막 던졌다.

"아! 작년 크리스마스에 만나서 지금 새해니까 벌써 일 년이란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냐. 넌 정말 기억 안 나? 우리의 첫 만남?"

남자 친구는 조금 섭하다는 듯이 반대편 버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거리로 나온 우리 둘은 손깍지를 꼬옥 낀 채 목적지가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레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왔다. 겨울방학 보충 땡땡이를 치겠다고 학교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아직도 사무실로 출근 중인 차들이 도로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다. 데이트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일단, 나왔으니 어디든 가야 했고, 어딜 가든지 잘 놀아야만 했다. 아니, 아이스크림을 급하게 먹었을 때 골이 띵할 만큼 달콤해야만 했다. 첫 데이트니까.


아무 생각이 없던 나와는 달리, 남친은 나름 계획이 있긴 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의 훈훈한 공기와 달리 1월의 바깥 겨울 공기는 차가웠다. 손도 마음도 따뜻했지만, 교복 치마밑 다리는 시렸다. 그 다리가 안쓰러워 보였을까? 아침 댓바람부터 거리를 헤매기보다는 조조영화를 보자는 남자 친구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며, 시내 번화가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를 올라탈 때도, 작은 해프닝이 벌어져 조금은 어색함이 날아갔다. 나의 왼손을 잡고 있던 남친과 손깍지를 풀기 싫어서 버스에 나 먼저 올라탔다. 근데, 난 돈이 없다. 가방마저도 팽개친 채로 도망 나왔기에, 주머니에는 휴대폰하나 달랑 들어있을 뿐이었다. 계산도 하지 않고 버스에 오르자, 운전기사 아저씨는 내가 차비를 내는지 안 내는지 룸미러로 유심히 쳐다보셨다. 그 눈을 피하며 운전석 반대편 앞 좌석에 앉자, 새끼줄에 엮인 굴비처럼 딸려 올라온 남친이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면서 왼손으로 코트 속 가슴 쪽 주머니 안에서 카드를 꺼내려다 실패했다. 손을 놓으면 될 텐데, 애쓰는 모습이 귀여워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도록 해서 나의 오른손이 자연스레 그의 행동을 돕는다. 그 사이 남친은 뒤따라 올라오는 사람과 부딪혀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그를 붙든다는 것이 그만 그의 멱살을 잡아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코와 내 코가 아슬아슬 맞닿을뻔했다. 남친의 눈이 또 한 번 휘둥그레졌다.


"네 말 잘 들어야겠어. 알고 보니, 조금 무서운 여잔걸?"

무서운 여자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 잡았던 멱살을 수줍은 듯이 놓으며, 왼쪽 가슴을 톡톡 두드려 밀어내는 데 여전히 남친의 심장은 쿵쾅거리고 있다. 이 쿵쾅거림은 쉽게 전염되는 병인 거 같다. 애써 태연하려, 얼른 카드나 꺼내야겠다. 운전기사 아저씨가 우릴 계속 째려보는 듯하다.


"두 명요."

남친이 카드를 갖다 대자, 디딕 계산 완료 신호가 들리고, 운전기사 아저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행히도 출근길이지만, 번화가로 향하는 우리가 탄 버스는 조금 여유로웠다. 남친이 내 귀에 입을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뒤에 자리 있어, 얼른 일어서."


속살거림에 귀가 저릿해졌다. 하아~ 정말. 얼른 일어나서 말을 듣지 않으면, 계속 속살거릴 거 같다. 남친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니, 운행 중인 버스 안이라 한없이 비틀거린다. 혹여나, 넘어질까 봐 남친은 중심을 잡으려 얼른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더욱 꽈악 손을 조여왔다.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며, 한걸음 한걸음 남친을 따라가는 그 짧은 거리에 내 중심을 잡아주려 애쓰는 남친이 매우 든든하게 느껴졌다.


[출처] m.blog.yes24.com/document/7703065


맨 뒤 두 번째 자리에 나란히 앉으니, 다시 약간의 어색함이 밀려왔다. 나는 남자와 이렇게 무릎이 닿을 정도로 나란히 앉는 상황에 익숙지 않다. 여중을 나왔던 나는 자연스레 남자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고, 남녀공학인 고등학교에 와서도 남녀분반인 데다 공부 외에는 크게 이성에 눈 돌리지 않았던 나는 여러 남자아이들과 자연스레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남친과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도 상당한 떨림이었다. 혹여나, 어깨나 다리가 부딪힐까 봐, 엉덩이라도 닿을 까봐 버스창가 쪽으로 붙으며 잔뜩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긴장감에 손까지 잡고 있으니, 내 심장은 제멋대로 펌프질 하기 바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긴장된 눈빛을 감추며 열심히 뇌를 돌려 예민함과 어색함을 무마할 이야깃거리를 찾고 또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친은 매우 침착했다. 분명, 심장 박동의 강도를 모르는 바 아닌데, 겉으로는 상당히 평온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나의 긴장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내가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지 그는 태연하게 우리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로 나의 호기심을 잔뜩 자극했다.


내가 아는 그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학학원에서 그냥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아이였다. 항상 같은 자리 그 자리에. 그러다, 내가 떨어뜨린 볼펜이 그의 발밑으로 굴러가서 그 기회에 말을 트게 되었고, 그렇게 가끔 이야기하다가 크리스마스이브날 뜬금 고백을 받고, 난 내가 받은 첫 대시라 거절을 못하고 사귀게 된 것이다. 솔직히, 착해 보이기도 했지만 외모가 내 취향이었던 것도 한몫하긴 했다.


나와 달리, 남친은 우리의 첫 만남을 제법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린 같은 수학 학원의 같은 과정을 수강했다. 오늘로부터 딱 1년 전 그날. 늘상처럼 나는 학원에 늦는 버릇이 있었다. 방학인데, 고2가 된다는 부담감으로 공부는 해야겠다 생각은 했지만 마음처럼 몸은 따라 주지 않았다. 학원 시간에 맞춰 겨우 도착했는 데, 수업 시작 1분 전 화장실이 급했다. 그래서, 얼른 뒷문으로 총총 걸어가 문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는 순간, 여닫이 문이 자동문처럼 복도 쪽으로 화악 열렸다. 미처, 손잡이를 잡지도 못했는 데 문이 열리니 급하게 움직이고 있던 몸이 관성의 법칙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내팽겨 쳐졌다.


철퍼덕. 땅바닥에 넘어져서 코피를 쏟아야 할 텐데, 약간은 폭신하고 단단하게, 엎어진 자세가 아닌 선 자세로, 문 바로 뒤에 서있던 남학생 가슴에 그대로 내 얼굴이 파묻혔다. 중심을 잃은 몸을 견디기 위해 두 팔은 순식간에 그의 허리를 감싸버렸다. 놀란 남학생은 만세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어정쩡하게 양팔이 위로 들려졌다. 누군가 옆에서 봤다면, 분명 내가 그에게 힘차게 달려가 안긴 꼴이었다. 이 부끄러움은 그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헷갈릴 겨를도 없이, 잽싸게 그를 모질게 밀쳐내고선 그 장소를 피해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남친은 남친대로 너무 놀라서, 자기를 마음대로 껴안고 도망치는 여자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고 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찾아와 적극적으로 안긴 건 10여 년 넘게 키우던 말티즈 뿐이었다고 했다. 외아들로 맞벌이하시던 부모님이 안 계신 빈 집을 들어설 때면, 칠렐레 팔렐레 자기 발밑으로 달려와 안기던 말티즈. 그 댕댕이는 노환으로 작별해 더 이상 그에게 안기지 못한 지가 한 달 될 무렵이었다. 세상 더없이 외롭고 슬프기만 하던 시절. 이제 누가 자기를 안아주나 싶었단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뜻밖의 장소에서, 말 못 하는 생명체가 아닌 말이 통하는 생명체인 조그만 여자가 이렇게나 스스럼없이 달려와 안겼단다.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니,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묘한 희열이 슬며시 가슴 저구석에서 피어올랐단다.


그 후론, 학원을 오면 이 조그만 말티즈 같은 여학생을 찾았다고 했다. 늘 일찍 오는 법이 없던 여학생은 첫 만남 때처럼 수업 시작 1분 전이나, 아니면 수업 시작한 지 2~3분이 지나 뒷문을 빼꼼히 열어 살금살금 까치발로 들어와 바깥 풍경이 보이는 창가 쪽 줄의 뒤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수업을 시작하는 강사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아야 했건만, 시선이 자꾸 나에게로 향했단다. 이렇게는 도저히 강의를 들을 수 없을 거 같아서, 나를 절대 볼 수 없는 자릴 찾은 것이 바로 내 앞자리였던 것.


수업 시간에 뒤를 돌아볼 수 없으니, 눈 대신 귀가 열렸단다.

"너, 그거 알아?"

"또, 뭘?"

강아지 이야기에 살짝 눈물을 비추던 남자 친구를 보니 애처로우면서도 금세 활기를 찾아 이야기를 이어줘서 어색함은 조금씩 풀리고 있었고, 내 기억에서는 부끄러워 지워버린 이야기를 나에 대한 애정을 담아 예쁘게 술술 풀어내는 그가 내 마음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게 느껴져 조금은 간지러웠다. 또, 무슨 이야기로 내 맘을 홀리려는 지 조금은 기대가 되기도 했다.


"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풀이가 시작되면,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치는 버릇이 있어. 그러다 문제가 해결되면, 아주 작게 햐아~라는 숨소리가 들려."

"내가 그렇다고? 어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거 같지?"

"하하. 1년간 내가 널 관찰한 결과야. 그래서, 난 너무너무 공부가 잘 되었어?"

"엉?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의 말티즈가 뒤에서 낑낑거리고 있었는데..."

"네가 어떤 문제를 어려워하는지 아니까, 나라도 잘 들어서 알고 있어야 했거든. 내 뒤에 앉아 있으니, 내게 물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섭하게도 한 번을 안 물어보더라."

"혼자 진도 너무 나간 거 아냐? 그냥, 혼자 연애하고 있었나 봐. ㅎㅎ"

"여튼, 난 그랬어. 집에서도 네가 내게 질문할 그때를 상상하며 복습까지 했지. 그래서, 수학 성적도 많이 올랐고..."

"우와, 넌 내가 엄청 고맙겠다? 내가 은인이라고 생각되면, 오늘은 네가 다 쏘는 거 어때? 히~잉, 나 아무것도 못챙겨 나와서 오늘 하루 거지라고."

"너 조금 기죽어 있던 게 그 때문이었어?"

"내가 기죽긴 뭘 기죽어? 나한테 한눈에 반해서 일 년을 짝사랑했다는 남자가 이렇게 옆에 있는 데..."

"말이 또 어찌 그리 되냐? 하하. 여튼, 난 그랬어. 정말 열심히 1년간 널 친애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점심을 사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사주지 말고 돈을 빌려줘. ㅎㅎ."

"그럼, 난 거절 안 한다. 다 적어 놓을 거야."

"앗! 그런다고 그렇게 냉큼 말 받아가는 게 어딨어? ㅎㅎ"


버스안에서 우리의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어색할 것 같던 짝사랑 고백도 그가 자연스럽게 잘 갈무리해서 그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빠져드는 게 겁이 나서 한번씩 튕기며 열심히 마음의 브레이크를 밟아도 소용이 없다. 난, 아직 고백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부터 내 최애는 바로 네가 될 꺼 같아...



※ 이야기와 다르게, 헤어진 지 <벌써 일년>인 노래이지만, 글을 쓰다보니 많이 생각나는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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