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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Apr 01. 2023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9. 토요일, 저녁 7시

12월 둘째 주.

 

연희는 자신이 이상한 여자로 보였을 것 같아, 선우가 자신을 잊어주길 바랬다. 그래서, 그 어떤 연락도 하지 않으며, 겨울을 맞았다.


학교는 기말고사가 끝났고, 연희는 처음 해보는 학생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처음이라,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가며 하느라 일의 진도가 드뎠다. 이 바쁜 와중에 교감 선생님이 연희를 불렀다.


"이선생, 이런 거 묻기는 좀 그렇지만, 만나는 사람 있나?"


"네? 없긴 합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아~, 그래? 그럼, 내가 사람 한 명 소개하고 싶은데,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나?"


"아... 그게 좀..."


딱 잘라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제 겨우 1년 다 되어가는 신입꼬리를 달고서 감히 교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에 딱 잘라 거절을 하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봐. 내 친구 녀석 아들인데, 이선생이랑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그래."


"아... 요즘 제가 너무 바빠서..."


"그렇지? 요즘 너무 바쁘지? 지금 당장 만나라는 말은 아니고, 방학하면 한번 만나봐. 내가 그 녀석한테 이선생 전화번호 줘도 될까? 방학 때 연락해 보라고 할께."


"아...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뭔가 편하지는 않았지만, 연희는 빨리 이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번호를 준다고 금세 연락올 것 같지는 않아, 연희는 이 일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 교감 선생님께서 또 연희를 불렀다.


"이선생, 내 친구 놈이 얼마나 성화인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만나게 하자고 난리야. 이번 주말에 시간 좀 안 되겠나?"


"아, 네... 그럼, 토요일 오후에 보도록 할께요."


"그래, 고마워, 내 그렇게 전할께.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둘이 알아서 정하도록 해."


"네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혼 없는 감사를 표하며, 연희는 자리로 돌아왔다. 단순한 소개팅이 아니라 마치 맞선처럼 불편해진 이 만남을 거절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래도, 이전 사랑을 잊게 할 따뜻한 사람을 만나면, 오히려 교감 선생님이 은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함부로 원망할 수는 없었다.


토요일 오후 3시.

번화가에 위치한 유명 카페에서 교감 선생님이 말해 준 친구 아들을 만나기로 했다. 먼저, SNS 계정을 주고받으며 얼굴을 확인했다.


남자의 계정으로 들어간 SNS에는 고급진 와인바에서 어두운 조명아래 잔을 들고 있는 옆모습, 카페에서 책으로 얼굴 반쯤 가린 채 책을 읽고 있는 모습, 석양이 비치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점프하며 찍은 뒷모습. 사실, 정면의 반듯한 모습은 어느 사진에도 없었다.


지난번 선우를 만날 때처럼, 그래도 상대는 자기를 잘 알아보지 않을까라는 기대로, 연희는 1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해 바깥 풍경이 보이는 큰 창가 옆에 자리 잡았다. 덤덤하게 창 밖 풍경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문이 열릴 때마다, 저 남자일까 싶어 고개가 자꾸 문쪽으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구이지만 건방져 보이는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아니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남자는 얼굴은 잘 생겼지만, 키가 좀 작은 듯했다. 그일까 했는 데, 그 남자도 아니었다.


세 번째로 들어온 남자. 말쑥한 옷차림에 웨이브 있는 앞머리를 옆으로 단정히 넘긴 구릿빛깔의 건장한 남자였다. 입구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성큼성큼 걸어서 연희가 앉은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남성미가 넘치는 남자는 매우 단단한 느낌의 남자였다.


"아, 제가 늦었나요?"


"아니에요. 제가 좀 일찍 나왔어요."


"뭐 하나, 마셔야죠? 전 아아, 그쪽은요?"


"저도 같은 걸로 할께요."


남자는 먼저 주문을 하고서, 진동벨을 받아왔다. 이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낯가림이 전혀 없는 듯 거리낌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전 별로 결혼할 마음이 없는데, 제가 5대 독자라 집에서 좀 성화입니다. 내년이면, 서른이라고 올해 유독 더 심하네요."


"아, 그렇군요."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만나서 생기나 싶기도 하고,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다 잘 사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냥 현실이죠. 대충 조건 맞춰서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도 전부터, 이 남자는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속사포처럼 퍼부어서 연희는 내심 불편했다.


"아~, 그러고 보니, 연희 씨? 이름이 연희 씨, 맞죠? 그쪽에 대해서 정보가 아무것도 없네요. 만나라고는 하면서 정보는 아무것도 안 알려주더라고요. 만나서 알아가면 된다나? 여튼, 어르신들은 정말..."


"뭐, 어떤 정보가 궁금하신가요?"


"이를 테면, 부모님이 무얼 하시는지, 어느 동네에 사는지, 형제관계와 그 형제들의 학벌 같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기본적으로 알려줄 만한 뭐 그런 기본 정보들 있잖아요?"


연희는 아연실색했다. 말로만 듣던 젊은 꼰대를 만난 느낌이었다. 어느 질문하나 자신 있게 대답할 만한 것이 없는 그런 질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기본적인 정보라는 말에 이 사람과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가진 것으로 급 나누려는 오만한 사람과 지금 한 자리에 있다는 자체가 대단히 치가 떨렸다. 그때, 진동벨도 부르르 떨렸다.


커피를 찾아오는 이 남자를 보며, 커피값을 반반 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아, 커피값은 깨톡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찾아온 커피를 내려놓으며 하는 이 남자의 말에 정이 떨어져서, 자신의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당장 그 남자의 얼굴에 퍼붓는 상상을 했다. 뭐가 이리도 당당하고 솔직한 지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연희는 적응이 잘 안 되었다.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던가요? 아! 서로 기본적인 정보부터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제가 말했죠? 먼저, 부모님은 어떤 일 하시는 분이세요?"


첫 질문부터 대답이 막히는 연희는 이 상태를 더 이상 참기 어려웠다. 아직, 기준의 부모한테서 받은 상처도 다 아물지 않았는 데, 다시 똑같은 일이 재연될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심장이 조여왔다.


"저랑은 조금 삶의 결이 다르신 분 같아요. 저는 첫 만남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은 불편해서...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제 자격지심일 수도 있구요. 죄송하지만, 제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커피값은 깨톡으로 보내겠습니다."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그 자리를 털고 나왔다. 상대편에 앉은 남자는 조금 민망스러운지 주변을 쓰윽 한번 돌아보더니,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페 문 앞을 나오는 데, 이유 모를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발버둥 쳐도 더 나아지지 않는 연희의 현실에 대한 슬픔이었다.


번화가인지라 사람들이 흘깃흘깃 눈물을 훔치고 있는 연희를 쳐다봤다. 얼른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빈자리가 많은 버스에 무작정 올라타, 사람이 별로 없는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눈물을 닦았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몇 정거장을 지났을 까?

버스는 점점 연희가 모르는 곳으로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장 쉽게는 반대편 버스를 타고 처음의 번화가로 돌아가 집으로 갈까, 아님, 하염없이 버스 따라 떠돌다가 버스 종점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갈까 연희는 잠시 고민했다.

 

이제껏 계획대로 살아온 연희지만, 서막 2장의 인생은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고,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느낌에 지쳐서,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버스처럼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맡기고 싶어졌다.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선우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자신의 손가락을 저지하기에는 조금은 늦어버린 듯, 벌써, 선우의 전화기 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 여보세요?


"......"


- 연희 씨. 연희~씨?


연희가 대답을 하지 않자, 선우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다급해졌다.


- 연희 씨. 무슨 일 있어요?


"흐~~~~~엉, 어~~~엉"


연희는 대답을 못하고 울고 말았다.


- 연희 씨, 혼자예요? 지금 어디예요? 제가 그쪽으로 당장 갈께요. 연희 씨, 말하기 힘들면 어딘지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봐요."


연희를 이렇게나 걱정해 주는 남자. 그에게 마음하나 준 적 없으면서 힘들 때마다 왜 자꾸 그를 찾는지 그런 자신이 더 미웠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감당이 안 될 때면 찾게 되는 사람. 김.선.우. 사진이라도 찍어보내 보라는 말에 힘을 내어 자신이 갈 목적지를 문자로 찍어 보냈다.


- 1818번 버스종점 -


- 연희 씨, 자리 옮기지 말고 꼼짝 말고 거기 있어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겨울이라 짧은 해는 벌써 숨어버렸고,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둑해진 버스 종점 사무실 앞 벤치에 앉아 선우를 기다렸다. 선우에게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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