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의 그 자리에 머물러...
#8. 토요일, 저녁 7시
무료한 일요일 오후가 이제는 연희에게 제법 익숙해지고 있었다.
상, 하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똥머릴 말아 올린 채, 동네 카페, '나무 위 커피'를 오랜만에 찾았다. 나무 위를 연상케 하는 복층 다락방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중간고사 후 새롭게 시작될 새 단원의 학습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 카페는 연애할 때의 추억이 많은 장소였다. 기준이 연희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갈 때면, 그 길 허전하지 않도록 연희는 기준의 손에 따뜻한 토피넛라테를 종종 쥐어주곤 했었다. 그렇게 손에 쥐어주면, 또 그것을 다 마실 때까지만 함께 있자고 기준이 졸라서 라테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몇십 분에서 때로는 한 시간도 더 넘게 얼굴을 마주하다 헤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동네 카페라 공간이 그리 크지 않기에, 카페에는 기준과의 추억이 없는 테이블은 없었다. 특히, 창가 앞 작은 선인장 화분 세 개가 나란히 놓인 바 형태의 긴 테이블 자리를 좋아했었다. 통창 유리 너머로 기준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이어서 두 사람이 모두 좋아했던 자리다.
하지만, 더 좋았던 만큼, 이제는 더 가슴 아린 자리가 되었다.
***
목련 꽃이 피어서 봄이 오려나 싶었던 올해 2월.
딱, 그 자리에서 연희와 기준은 헤어졌다.
"연희야, 정말 미안해. 내가 좀 큰 실수를 했어. 말 안 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고 너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도리라 생각돼서 하는 말이니까, 잘 들어줘."
"사람 누구나 실수하면서 사는 거잖아요. 선배답지 않게 뭘 그래요? 부담 없이 말해요, 선배."
"그때 말한 여 선생님 있지?"
"누구요? 이사장 딸이라던 사람요?"
"어... 지난주 회식 때 내가 너무 취했었나 봐. 난, 기억에는 없는 데, 아침에 일어나니, 그 여자가 내 옆에 누워..있..더..라."
"......"
"연희야. 정말 실수야. 내가 그 여쌤한테 조금도 사심 없었던 건 네가 잘 알지?"
"......"
"네 맘이 속상하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나, 용서해 줄 거지?"
"......"
부담 없이 말해보라고 했던 연희는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이렇게 큰 실수는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여태껏 살면서 배운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 부쩍 결혼 말을 꺼내던 기준과 그와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기준 부모에게 상처받은 연희는 그와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용기있게 나서지 못하는 기준에게도 섭한 마음이 보이지 않게 커지고 있던 때였다. 거기에, 이런 큰 실수라니... 이제는 끝인 듯 느껴졌다.
"연희야, 때리고 싶으면 나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그래도, 내 실수가 헤어질만큼 큰 그런 건 아..니..지?"
연희의 눈빛을 살피며 기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때리긴 내가 왜 때려요. 그리고, 욕은 내가 왜 해요? 전부 선배 이해해요. 그러니까..."
"역시, 연희."
기준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연희와의 거리를 좁혀, 큼직막한 손으로 그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연희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서, 자신을 이해한다는 연희가 기특한 듯 연희의 뒷머리를 몇번이나 쓸어내렸다.
"근데, 그러니까, 뭐?"
"우리, 헤어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하는 데, 헤어지자니?"
"하룻밤이 아무 일이 아닌 거는 아니잖아요. 선배가 사심 없었던 것 전부 다 이해해요. 하지만,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연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헤어져."
잘못했다고 빌기는커녕, 연희의 헤어지자는 말에 용서받지 못함이 화가 나는 듯 기준도 볼썽사납게 큰소리치며 덩달아 헤어지자고 했다. 그런, 기준을 뒤로한 채, 연희는 카페 밖으로 뛰쳐나왔다. 뒤따라와 잡을 줄 알았던 기준은 의외로 따라오지 않았다. 더 이상 연희를 붙잡지 않았다.
얼마 전, 임용고시에 최종 합격하자, 기준은 슬그머니 빨리 결혼하고 싶다며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임용 합격을 축하해 주고 싶다는 기준 부모님과 같이 저녁도 먹었다. 처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된 식사자리는 마칠 때는 화기애매해졌다.
이제 날만 잡으면 되겠다는 기준 부모님의 말씀에 연희가 가감 없이 현재의 상황을 말씀드린 게 화근이었다.
첫 월급부터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한다는 이야기부터, 아버지가 주담대 대출받아 시작한 주식 투자 실패로 그 빚을 제대로 해결 못하면 은행에 집이 넘어갈 처지에 놓였다는 이야기며, 그런 투자 실패 충격으로 병원에 몸져누워있는 아버지 병원비마저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까지 모두 말씀드렸다.
평소 이 집 사람이 다 된 듯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기에, 결혼이라는 단어 앞에서 연희는 현재의 상황을 빠뜨림 없이 낱낱이 전부 세밀하게 이야기했다.
늘 그랬듯이 기준의 부모님들은 연희의 말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실 줄만 알았는 데, 갑자기 리액션과 말수가 줄어들면서 그들 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 불편함을 표정 없는 기준도 느꼈는지, 기준이 식사 후에 둘이 가볼 곳이 있다는 핑계로 겨우 급마무리되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연희는 불편해진 그 식사자리가 못내 서운했다. 어떤 위로를 듣고자 말한 것도 아니고, 결혼 앞에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되어 말한 것이었지만, 그간 알았던 기준 부모님의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처음 느껴보는 낯선 표정과 반응에 연희 자신과 그 가정을 부담스러워하는 느낌이 들어서 뼈에 사무치도록 서운했다.
이건 분명 홀대였다. 이런 홀대받은 느낌을 표출하지 못하고 간직하고 살아야한다면, 그건 가족이 될 수없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기준과의 인연은 여기까지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했다.
게다가, 기준의 동료 교사인 이사장의 딸은 기준을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연희와 기준이 같이 있을 때도 학교 핑계로 종종 전화를 걸어와서 잘 끊지 않으며 데이트를 방해해 왔다. 연희가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면, 기준이 건 전화기 너머로 이사장 딸의 말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었는 데, 연희의 육감으로는 보통의 남녀사이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 여자와의 실수? 실수라고 하기에는 적어도 둘 중 한 명에게는 의도가 있었을 테고, 한 명은 동조했을 뿐인 일 같았다. 그런, 실수를 이번에 용서한다고 한들, 의도를 가진 상대가 있는 한,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연희 자신보다는 그런 그녀가 현실적으로 선배랑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준의 부모님 두 분 다 교육청 고위직이시고, 이사장과는 친구 사이였다. 가정 형편만 놓고 보더라도 자기보다는 이사장 딸과 함께하는 기준의 모습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이렇게 기준을 놓아주는 게 3년간 사랑했던 기준에 대한 배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좋아 이별이지, 실제로는 연희가 선배를 포기한 것, 아니, 기준이 더 잡지 않은 것을 보면, 기준이 먼저 연희를 포기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희의 가난 앞에서 망설이는 기준의 모습을 보는 것도 연희로서는 힘들었다. 자기가 먼저 연을 끊지 않으면 그마저도 못하고 주저할 기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기준은 무표정한 생김새와는 달리 부드러운 성정으로 부모를 거역하고 대세게 나갈 용기는 없이 나약했다. 부모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하는 그가 연희와 헤어지고 이사장 딸과 결혼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래서, 기준의 실수를 핑계 삼아 끝내 헤어지자고 말해버린 연희였지만, 오히려 기준의 강한 의지를 보고 싶었다. 연희 자신의 자격지심이 크기에 기준의 큰 실수에도 눈감아 용서해 줄 수밖에 없는 듯한 모양새가 아니라, 기준의 연희에 대한 커다란 애정으로 절박하게 그들의 인연이 강하게 이어지는 그런 모양새를 원했다. 카페를 뛰쳐나가는 그녀를 따라와 강하게 붙들어 주기를 바랬다.
헤어진 후에 찾아오거나 전화해서 하는 취중의 나약한 주정으로 말고, 맑은 정신으로 곧고 굳세게.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
***
이 테이블에서 자신이 포기한 사랑, 아니 포기당한 사랑을 떠올리기 싫어서, 그동안 이 카페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기준과의 관계가 명확해져서, 아니, 어쩌면 선우가 준 약이 효험이 좋은 건지 다시 이 카페를 찾은 지금은 편안했다.
어제 낮.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다 기준 선배가 탄 신혼여행 편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다. 기준이 보길 바란 듯이, SNS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귀에 해시태그를 달고 사진을 올렸다.
- #잘가~ #미련도없이~ #완전히날아가버려
올렸던 사진을 잊고서, 학습지를 만들고 있을 때, 자신의 SNS에 선우의 댓글이 달렸다.
- 혹시, 저한테 하는 말은 아니죠?
연희의 입맞춤에 눈이 동그래지던 순진한 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과 이 댓글이 닮은 듯하여 연희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아니라고 간단하게 답해주면 될 질문에, 괜스레 장난을 치고 싶었다.
- ㅎㅎㅎㅎ. 잘 생각해 보세요. 모르시면, 출제자 찬스도 있습니다.
리댓을 달고 깜짝 놀랐다. 출제자 찬스라니... 내심, 선우의 전화를 기다리는 제 자신을 본 듯해서 순간 움찔했다. 두 번씩이나 민망한 짓을 저지른 죄스러움에 감히 통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제정신으로 돌이켜보면, 연희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아~ 정말 나 왜 이렇게 뻔뻔해진 거지? 그냥 이대로 잠수 타는 게 맞겠지?'
선우에게서 전화가 올까 봐 두려운 마음에 연희는 조용히 폰을 끄고, 원래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창 밖 거리의 플라타너스는 이런 연희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 듯 우두커니 서서 연희를 바라보다 그러면 안 된다는 듯 나뭇잎을 흔들었다.
'다시는 선우 씨에게 연락 안 할 거야. 부디, 나를 잊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