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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셜리 Jun 20. 2016

그라나다의 인연

귀가 간질간질

스페인 Part4.


오늘도 여전히 새벽부터 눈이 떠진다.

스페인에 온 지도 벌써 5일째, 비행기 탄 시간 빼고는 하루하루가 너무 빠르게 흐른다.

오늘은 저녁때 렌페를 타고 세비아로 가야하기 때문에 무리한 일정을 잡지 않고 여유있게 있다가 가기로 했다.


일단 호텔 바로 앞에 있는 그라나다 대성당부터~

입장 시간에 맞춰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에 짐을 맡긴 뒤 성당으로 갔다.  입장시간 5분 전이라 당연히 우리가 1등일 줄 알았는데 한국인 여자애들 3명이 셀카봉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부지런한 그녀들 덕분에 우린 두번째로 입장했다.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그라나다 성당은 뭔가 묘한 느낌이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교차점같은...  

성당 안에 들어서니 어마어마한 하얀 석조기둥들이 입이 떡 벌어지게하고, 황금장식과 스테인드글라스가 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그라나다 성당은 말라가 성당이나 론다의 성당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아기자기한 면은 없지만 거대하고 웅장하고 또 차갑다. 마치 이른 아침에 면도를 하고 싸~한 스킨을 바른 남자 같다고 할까?

암튼 내 느낌은 그랬다.

그라나다 성당에서 나와 어제 갔었던 알함브라궁전의 뒷길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다. 근데 어째 걸으면 걸을수록 풍경이 아주 익숙하다. 여기가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모를만큼. 그나저나 이 익숙한 느낌은 뭘까~

산책로에서 내려와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어제 알함브라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음료 한 잔만 시켜도 타파스가 나오는 맛있는 식당이 있다해서 찾아봤는데 이름도 모르고 설명만 가지고 찾아가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어제 저녁때 가려던  맛집이 바로 보여서 일단 들어갔다. 역시.. 맛집을 검색하고 온 건지 한국인 손님들이 꽤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 본다. 스페인 식당에 올 때마다 까막눈인 우리는 메뉴 고르는 게 여간 큰일이 아니다.

뭘 시켜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뒷자리에 혼자 앉아있던 한국청년이 우리에게 기차역 가는 방향을 묻는다. 우린 갖고있던 지도로 방향을 알려주고 청년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데 '같이 먹자고 할걸 그랬나?' 하는 순간 청년이 다가와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앉으라 하고 얼굴을 보니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모습이다. 스무살 정도 됐을까?....


간단히 호구조사를 해보니 사는 곳은 분당, 군대까지 다녀오고 무역학을 전공하는 스물 여섯 살 학생이란다. 1년전에 스페인어를 잠깐 배웠는데 언어를 배우다보니 스페인에 관심이 생기고 바로셀로나 콜롬버스 동상을 꼭 보고싶어졌단다. 그래서 이번에 스페인에 와서 콜롬버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을 때의 감동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고.. 꿈을 이룬 기분이라나?

그리고 혼자 모든 걸 해결하다 보니 렌페예약을 잘못해서 없는 살림에 100유로나 날렸단다. 딱하지~ 우리에 대해서도 상당히 궁금해 하는 눈치였으나 그냥 직장인인데 어렵게 연가내서 왔노라 대충 얼버무린다.


청년은 자기 고모가 마흔 살인데 마흔까지는 누나라 부른다며 누나라 부르겠단다. 누나라는 소리에 귀가 간질간질하였으나 아주 싫지는 않았다. 그 청년이 스페인어를 좀 하는 덕에 오늘의 메뉴와 샹그리아를 시켜 오랜만에 제대로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밥을 다 먹고 계산을 하는데 혼자 여행하는 청년이 대견하기도 하고 100유로나 날리고 얼마나 멘붕이었을지 안쓰러운 마음에 누나들이 밥값을 내주겠다고 했더니 극구 사양한다. 그래도 밥값을 내줘야 맘이 편할 것 같아서 내주고 서로 일정을 맞춰보니 그 청년도 론다에 가기위해 5시에 렌페를 타러 기차역에 간다고 해서 우리와 같이 다니기로 했다. 청년의 동행으로 우리의 여행도 생기를 찾는다.

셋이서 집시들이 사는 알바이신을 둘러보고

산니콜라스전망대에 가기로 했다. 전망대를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골목길이 하도 복잡해서 물어물어 찾아가도 힘들었다. 전망대 근처까진 왔는데 어딘지 몰라 관광객으로 보이는 부부에게 물어봤는데 프랑스어밖에 모른단다. 하필 프랑스분들에게 길을 묻다니... 바디랭귀지를 하다 말이 안 통하니 감사하게도 직접 데려다 주신단다. 말은 안 통해도 마음은 통하나 보다. 고마운 마음에 고등학교 불어시간에 배웠던  "메르씨 보꾸"라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분들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나 또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프랑스 부부 덕분에 더이상 헤매지 않고 무사히 전망대에 도착했다.

와~~~~~~~

전망대에 오르니 알함브라궁전과 알바이신이 모두 보인다. 전망 진짜 좋다!

광장 한가운데 따사로운 햇살 아래 집시들이 모여 앉아 기타를 연주하고 기념품을 판다. 그럴리는 절대! 없겠지만 어디에도 근심은 없어보인다. 그들이 진정 자유로운 영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복잡한 골목길을 내려와 호텔에서 짐을 찾아 기차역으로 간다. 청년이 점심을 얻어 먹은 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굳이~ 주스라도 사주겠단다. 카페테리아에서 주스를 마시며 바로셀로나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준다. 어쩜 그리 말도 잘하는지... 귀가 또 간질간질하다.


이때 친구의 아는 언니론다에서 그라나다역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온다.  낯선 타국의 기차역 대합실에서 만난 우리 넷은 오랜 지인처럼 대화가 끊이질 않는다.  시간은 흘러 솜털청년은 기차시간이 다 되어 먼저 떠나고 친구의 아는 언니와는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셀로나에서 다시 만나자는 기약을 하며 헤어졌다.


기차시간에 맞춰 플랫폼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기차시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다. 그래도 오겠지 하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우리 옆에 앉아있던 시크한 아저씨가 표를 좀 보여달란다. 보여줬더니 기차에 문제가 있어 출발이 15분 지연되고 플랫폼도 건너편으로 바뀌었다며 친절하게 영어로 알려주신다. 생각해보니 뭐라뭐라 방송이 몇 번 나온거 같다. 스페인어를 모르니 알 수가 있나...  아저씨가 우리가 세비아간다는 얘기를 얼핏 듣고 알려주신 모양이다. 정말 정말 고마웠다. 그 분이 아니었으면 우린 어찌 됐을지...

이번 여행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내가 어려움에 빠질 수 있는 순간마다 나타나서 수호천사처럼 도와주신다. 낯선 사람이라고 경계하기만 했던 나를 계속 반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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