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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륜휘 Feb 24. 2021

걷기의 파편

“여기부터는 신선들이 놀이하는 공간이에요.”

  

좌이산 신선계에서 바라보는 자란만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리베카 솔닛. 


  손으로 꼼지락 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마크라메라는 매듭 공예와 조개껍질을 엮어 발을 만든다. 전문적으로 마크라메를 배운 적은 없다. 유튜브를 보다가 직접 만들기를 반복했다. 영상을 만든 이의 작품이 참 예쁘지만 나는 똑같이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나의 것으로 재탄생 시킨 것이 조개껍데기 발이다. 물고기를 매듭으로 만들고 싶어서 실패도 여러 번 했다. 지금도 제대로 못 만들지만 나는 이렇게 내가 그리는 것을 만들어가는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만드는 것은 재미가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변주를 통해서 나의 색깔을 채워가는 중이다. 그래서 공방은 창고 같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아늑한 작업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늘 제자리에 앉아서 이 구상 저 궁리를 했다. 살은 10킬로그램이 쪘다. 구구가 말했다.

  “지난 6월 이후로 늘 앉아만 있었잖아요.” 

  구구와 고성에 있는 좌이산을 등산할 때였다. 호흡이 가빨라져서 한 걸음 내 딛기가 벅찼다. 나무처럼 주저앉아 버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초콜렛을 건내기도 하고 헛개수를 주면서 나를 달래는 구구였다. 책이나 스마트폰 그리고 여타 짐들이 모두 구구의 가방에 있었다. 내게 주어진 놀이는 산을 오르는 일밖에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는 심술이 나서 도달하기가 싫어지기도 했다. 구구는 널직한 바위가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곳을 신선계라고 했다. 

  “여기부터는 신선들이 놀이하는 공간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루니계는 한 보 앞당기기가 벅찼다. 구구는 빨리 걸을 필요 없다고 다독이며 나를 데리고 제법 높은 곳 까지 올랐다. 벤치만 보면 눕고 싶어지고 계단만 보이면 앉고 싶었다. 공방을 운영하면서 살이 많이 쪘기에 여러 운동을 해보고자 노력했다. 요가, 복싱, PT, 스피닝 등 하지만 어느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살을 빼라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었고, 좀 걸어 다녀보라는 조언도 자주 했다. 책으로서 세상을 익힌 기억들이 있기에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구입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남기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는 위의 리베카 솔닛의 글이 적혀있었다. 바느질을 좋아하는 내게 무엇보다 걷기가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저항이라는 끈끈한 의지에 힘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을 걸었다. 

  걷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햇살을 받으며 걷는 자의 여유를 느낄 수 없었다. 내게 산책은 고난의 행군이었으며 바느질이 뜯기는 기분이었다. 한적한 도심을 걷는다는 것에 매력을 느낄 수 없었다. 차라리 방 안에서 만보를 채우던 지난날의 내가 더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유하기를 겁내는 것일까? 방 안에서 걸을 때는 목적이 하나였다. 걸음수를 채워서 만보를 달성하겠다는 가벼운 목표 말이다. 산책은 너무 다양한 모습을 만나게 되서 피곤했다. 새로 생긴 가게에 들어 가봐야 할 것 같고, 바나나빵이 먹고 싶지 않아도 사먹어야 할 것 같고. 내게 오는 정신적 피로가 걷기의 피곤함을 더할 뿐이었다.     

  어째서 방 안에서 걷는 것과 야외에서 걷는 것의 만족도가 이리 다를까 의문이 들었다. 나무가 말했지라는 노래의 가사에 마지막에 나무는 대답한다. 

  “너는 왜 사니?”

  “그냥.”

  그냥 걷기가 이토록 내게 힘겨운 이유가 뭔지가 궁금했다. 편집증적으로 내 삶을 꾸려가는 것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방 밖은 세상이다. 세상이 나는 궁금하지가 않다. 나라는 보여지는 세상이 중요할 뿐이다. 세상이 두렵다. 알아가야 하고, 상처 받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심연으로 가라앉다가 나는 못 일어나게 될까봐 두렵다.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다시 일어서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말이다. 

  엄마는 <나는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면서 인생을 배웠다>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봐서 세상이 두렵다. 목적 없이 걸어가는 길이 불안하고 가슴 저미게 낯설다. 나는 <걷기의 인문학>을 읽고 세상을 걷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산책이라는 여유로운 순간이 내게는 지독한 시간일 따름이다. 대신 건강을 위해 방 안에서 걷는 것을 계속하리라 다짐한다. 방 안에는 나를 해치는 점들이 없다. 나의 반려견 나무를 보며 걷다보면 웃음이 난다. 나무가 놀아달라고 고래인형을 물고 온다. 그러면 고래를 발로 멀리 차버린다. 나무는 좋다고 쪼르르 떨어진 고래를 물어 온다. 나를 해치지 않는 아름다운 걷기의 장면이다. 

  “루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해요.”

  구구는 나의 건강을 염려한다. 그래서 이 번 등산을 계기로 매주 2회 등산을 가자고 꼬드긴다. 구구는 혼자서도 집 뒤의 각산을 잘 다녀온다. 몸이 무거워져서 오르막을 오르는 게 생각보다 더 고되다. 그래도 구구와 함께하는 등산이라면 조금 안심이 된다. 나는 루니계에 머무르지만 구구는 등산을 하며 신선계에도 도달한다. 몸무게에 충고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리는 요즘이다. 기분 나쁘지는 않다. 살이 찐 것은 사실이고 이대로 유지한지도 오래되었다. 10개월 동안이나 10킬로그램을 찐 채 살아왔다. 

  “등산 어땠어?”

  내가 구구에게 묻자 구구는 좋았다며 응답한다.  

  “뭐가 좋았어?”

  “루니가 같이 가서 좋았어. 루니가 요즘 안 움직였잖아. 루니가 너무 쌕쌕거려서 중간에 포기할 것 같았는데 끝까지 간 것도 좋아. 그리고 이번을 계기로 루니가 자주 움직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생겼어. 오늘 등산을 해냈으니까! 장하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방 안에서 하는 걷기의 파편이지만 건강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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