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서
갑자기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방송작가를 하다가 잘린 적이 있는데 교체되는 작가들을 본 적 있지만 내가 그 입장이 된 건 처음이었다. 이유는 시청률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잘린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교체된 이후에도 시청률은 별반 나아지지 않아서 폐지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내가 하던 프로그램의 작가 팀 전체, 8명이 잘렸는데 그날 제작사 대표가 미안하다며 우리를 술집에 데려가 회식을 시켜주었다. 대표 말로는 자신과 상관없이 본사의 뜻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보기엔 그놈이 그 놈이었다. 다음날 새로운 작가들이 출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늘까지 모든 짐을 빼 달라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사람을 구하는 제작사 대표가 우리가 보기엔 더 나쁜 놈이었다.
우리는 제작사 대표의 통장을 거덜 내주겠다는 듯 술과 안주를 시켰다. 평소엔 맛만 보던 은행 꼬치를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다. 인원은 전부 9명이었지만 술값이 어마어마하게 나온 걸로 기억한다. 다시는 볼 일 없다는 생각으로 부어라 마셨다.
결국 술병이 나서 밤늦게 회사에 찾아가 짐을 뺐다. 술병도 술병이지만 그 이후로 한동안 회복이 힘들었다. 그들이 판단한 것처럼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작가 때문이면 어쩌지? 앞으로 방송작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
우리는 교체됐지만 프로그램의 제작사와 연출, 출연진은 그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인수인계를 해줘야 했다. 우리가 원해서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들에게 진행상황, 그간의 회의 내용을 모두 공유해야 했다. 그 와중에 소품 하나가 없어졌다며 의심을 받았다. 정말 정말 정말 화가 났다.
보통 고생을 하더라도 끝나면 모든 게 추억이 되기 마련인데 그 프로그램은 생각하면 욕만 나왔다. 문득 그 프로그램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 번은 대표가 해외 촬영을 다녀온 뒤에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현장에서 막내작가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라고 했다. 그 현장에서의 막내는 당시 7년 차였던 나를 얘기한다. “방송 7년 차가 되더라도 현장에서 막내는 막내다.”라고 했는데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걸까? 막내 위치의 사람은 무조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된다는 소리인가? 막내로 데려가서 막내 역할만 시킨 것도 아니면서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한다.
먼 타지에서 방배치부터 촬영 답사, 소품 체크, 촬영장 세팅, 출연자 케어, 촬영 후 인터뷰에 밤마다 쪽대본까지 썼다. 대표는 제작비 핑계를 대며 최소한의 인원만 촬영에 데려가는 상황에 본사의 몇 명을 촬영팀에 끼워 넣어 관광하듯 함께 놀았다. 촬영 쉬는 시간에 자기들끼리 골프를 치고 왔다며 너스레를 떨어놓고는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사람에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난 대표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 대표는 방송작가 출신이었지만 작가의 노고는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함께 촬영을 다녀온 선배가 나를 위로하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방송은 작가와 연출, 출연진, 카메라, 홍보(마케팅), 방송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손의 손 잡고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누군가 한 사람만의 책임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재미가 없다면 그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짜내 만들어낸 게 그것일 뿐이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 책임질 사람은 필요하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책임, 재미없는 책임, 논란을 만들어낸 책임. 대부분 그 책임은 책임 없는 사람들이 지곤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지만 떠나는 중은 너무 억울하고 서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