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도 사람이다

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서

by 멍든새

한 번은 벨기에로 촬영을 간 적 있다. 그곳은 나에게 헬기에로 기억에 남았다. 당시 내가 했던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이 노동을 통해 여행 경비를 충당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너무 리얼해서 문제였다. 온갖 일을 다 겪은 역대급 촬영지였다.

벨기에에 도착한 첫날, 해가 진 뒤에 촬영 세팅 때문에 길을 혼자 걸었는데 외국인들이 “니하오”라며 말을 걸었다. 나중에 게스트하우스의 스탭이 “여기선 혼자 다니는 거 굉장히 위험해”라고 경고해줘서 내가 위험했다는 걸 알게 됐다. 벨기에는 동양인, 특히 여성 동양인에 대한 인권이 바닥 수준이라고 한다. 여행책자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았기에 조심해야 된다는 생각을 못 했다. 여느 관광지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매니저 한 명이 사건(?)을 겪는 현장에 함께 있었는데 그는 굉장히 우락부락하고 문신도 많아서 무서운 인상이었다. 쉽게 건들 수 있는 인상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 다가와 남자의 소중한 부위를 가격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또 목을 조르려는 듯 두 손을 목에 가져갔다. 당황한 매니저가 “뭐야!”라고 하면서 외국인의 손을 쳐냈는데 알고 보니 매니저가 하고 있던 목걸이를 훔치려고 했던 거였다. 사건은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순식간에 벌어졌다. 결국 다친 사람도, 없어진 물건도 없었기에 해프닝으로 넘어갔다.

그날 오후에 브뤼셀의 예술의 언덕에서 촬영을 이어가던 우리는 약에 취한 듯 보이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물을 뿌리고 (물은 맞겠지?) 총으로 다 쏴버릴 거라며 시비를 거는 콩고인이 있었다. 그는 동양인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현지 코디의 도움을 받아 즉시 경찰에 신고를 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정말 겁이 났다. 그에게 정말 총이 있으면 어쩌지? 그가 정말 우리를 총으로 쏘면 어쩌지? 살면서 처음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낯선 타지에서 일이 뭐라고 목숨 걸고 일하고 있는지 서러웠다.

그중에 더 상처가 됐던 건 한 PD가 “연예인들 먼저 가시라”며 그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그 상황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실망감이 들었다. 사람 목숨의 경중에 연예인과 비연예인이 따로 있나? 아무도 나를, 우리를 지켜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촬영은 매일 한계를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작가는 무엇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 여전히 나의 자리를 찾는 일이 힘들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벨기에는 정말 아름다운 나라였기에 꼭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벨기에에서 좋은 추억도 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촬영을 하던 중이었는데 2층 건물에서 창문 너머로 인사를 건넨 소녀들이 있었다. ART라고 쓰인 학원이길래 미술학원인 줄 알았더니 미술 심리 치료로 비행청소년들을 교화하는 장소라고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몇 번 눈인사를 건네며 자기들끼리 소곤소곤하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에 스태프의 숫자대로 아이스크림을 선물 받았다. 순간 우리는 ‘연예인을 위한 선물인가? 그들의 팬인가?’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벨기에에 온 것을 환영하고 고맙다며 좋은 기억을 갖고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그 소녀들 덕분에 벨기에에서 좋은 추억 하나 간직하게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촬영은 무사히 마무리되어 예정대로 방송되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