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은 시련과 함께 온다

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서

by 멍든새

어느 날, 친구에게 메인 PD를 소개받아 TV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 자리로 가게 됐다. 방송을 통해 얻은 영감을 음악으로 만들어 그 음원 수익으로 힘든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었다. 여러 명의 출연자가 출연료도 (거의) 없이 좋은 취지로 함께했다.

나는 기획 단계부터 함께 해서 프로그램명을 짓고 섭외, 프리뷰, 촬영, 편집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이때 나는 운이 좋게도 해외 촬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메인작가인 ㅇ언니 덕분이었다. 그동안 보고 지낸 것이 있으니 할 수 있을 거라고, 한국에서 카톡으로 진행상황을 보고받고 서포트를 해주셨다. 매일 터지지 않는 와이파이로 언니와 연락하기 위해 노력했던 밤들이 떠오른다. ㅇ언니는 그 시절 나의 버팀목이었고 롤모델이었다.

ㅇ언니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3개월 동안 무급으로 기획안, 사전 미팅 등을 진행하며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겨울이었고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PD와 함께 매일 미팅을 핑계로 술을 마시며 돈을 받지 못했고 일도 배우지 못했다. 친구에게 소개받은 메인 PD만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힘든 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월세를 낼 돈이 없어서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고 차비가 부족해서 길거리에서 교통비 1000원을 구걸(?) 한 적도 있다. 한 번은 역무원의 도움을 받아 회의에 늦지 않게 가편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가편실이 있는 여의도에서 망원동 자취방까지 자주 걸어 다녔다. 그때는 이 모든 순간들이 추억이 될 거라며 참고 견뎠다.

프로그램은 ㅇ언니가 합류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간 우리는 출연자가 아니라 언니를 기다렸던 것처럼 느껴졌다. 촬영을 다녀오고 편집을 하고 방송 준비를 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촬영 준비도 했다. 처음에는 후배가 나뿐이라 ㅇ언니에게 직접 지시받을 일이 종종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많이 혼났고 몇 번은 상처가 되는 말도 들었다. 당시의 나는 문서 작업에 서툴렀고 촬영, 방송에 어떤 게 필요한지도 몰랐다. 센스도 없었고 융통성도 없었다. 프리뷰를 시키면 밤을 새우고 다음날 출근을 안 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에는 겁도 많았다. 게다가 ㅇ언니는 까마득한 선배였기에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고문관이었다. 능력도 없이 의욕만 앞섰다. 자르고 싶어도 기획료도 없이 일했던 나를 차마 내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ㅇ언니와 내 사이에 새로운 작가가 오게 되었고 더 이상 혼나는 일은 없었다.

한 번은 함께 맥주를 마시며 ㅇ언니가 나를 많이 혼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 작가들은 연차별로 세팅하기 때문에 메인 작가가 직접 막내에게 일을 지시하는 건 굉장히 생소한 일이라며 이런 상황이 오랜만이라 처음엔 화가 나기도 했다고, 이젠 직속 선배가 왔으니 더 잘 배우라고 이야기해주었다.

ㅇ언니가 어렵지만 싫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니에게 좋은 작가로 인정받고 싶었다. ㅇ언니처럼 존경할 수 있는 선배를 만나는 건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나에겐 좋은 작가로 성장하는 것보다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이 프로그램에 (소위 말해) 꽂아준 메인 PD가 케냐 촬영까지 다녀온 뒤에 잠수를 탄 것이다. 전날까지도 사무실에서 편집을 하던 그가 시사 날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았고 연락도 안 됐다. 메인 PD의 여자 친구에게도 연락했지만 잠수 탄 그를 찾을 방법이 없었다. 한 프로그램의 수장이었던 그의 잠수는 습관이었다. 이미 몇 번의 잠수 전적이 있었고 그를 알던 사람들도 이번엔 다르겠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당장 방송을 준비해야 되는 상황에서 그가 사라지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물었다. 그와 함께 촬영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고작 1년 차인 막내작가에게 그들은 내일이 없을 것처럼 화를 냈다. 그때 나에게 구원자는 메인작가인 ㅇ언니뿐이었다.

우리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매일 사무실에 있었다. 집에 가면 함흥차사인 조연출을 내 자취방에 데려가서 씻기고 재웠다. 나는 케냐에서의 모든 촬영물을 직접 프리뷰 했고 조연출과 함께 붙어서 더듬더듬 영상을 편집했다. 그리고 그걸 ㅇ언니와 함께 보며 다시 편집했다.

당시 제작비 여건상 상황이 열악했고 방송이 임박해서 다른 PD의 도움을 받을 여유가 없었다. 또 제작사 대표가 재택근무는 일한 걸로 인정할 수 없다며 월급을 주지 않으려 해서 방송사에서 제작비 통장을 가압류당하는 등 안팎으로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가까스로 3회의 분량을 만들어 방송으로 내보냈다.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원래의 취지대로 프로그램을 통해 아픈 사례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코끼리 피부병이라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다리가 코끼리처럼 퉁퉁 부어 걷기도 힘들게 되는 병이었다. 실제 병명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프로그램에선 그렇게 불렀다.

최종적으로는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에 관심을 가졌고 기부도 많이 받았다. 방송을 통해 치료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소개되었기에 일회성이 아니라 한동안 관심이 이어졌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 편, 우리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고난으로 밥을 먹고사는 우리가. 힘든 상처를 후벼 파면서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게 점점 익숙해졌다. 다행인 건 우리 방송이 그녀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작가로서 목표가 생겼다. 세상에 조금씩이나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방송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과정은 힘들더라도 나중에 결과를 보면 하길 잘했다고 느끼는 방송을 만들고 싶었다. 이후에도 가끔 그렇게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을 팔아 방송을 만들었다. ‘이게 맞는 건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들이 자주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출연자들에게 “방송 출연하길 잘했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몇 번, 매번 고비와 같은 촬영이 이어지고 결국 ㅇ언니가 그만두었다. 나도 뒤따라 프로그램을 떠났다. 방송사는 더 좋은 제작사를 찾아 오랫동안 방송을 이어오다가 현재는 종영된 것 같다. 그때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작가로서 한층 레벨 업한 것 같아 후회는 없었다. 일을 하며 가장 중요한 건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또 기쁨은 시련과 함께 온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