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내 이름을 찾아서
24살에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가 되었다. 서브작가가 없어서 나보다 20살 이상의 선배(아카데미 다닐 때 선생님)에게 직속으로 일을 배우게 되었다. 호칭도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몸담았던 프로그램은 인지도가 높지 않아도 나름대로 마니아가 형성된 프로그램이었다. 덕분에 폐지될 걱정은 하지 않았다.
주 3일간 녹음을 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재택근무를 했는데 보통 하는 일은 자료를 찾거나 섭외를 하는 등 자잘한 업무였다. 오프닝과 엔딩 멘트는 메인 작가가 쓰고 나머지 코너는 출연자(전문가)가 보낸 원고로 방송을 했다. 직접 글을 쓰지 않아서 작가라는 호칭이 과분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맡은 주요 업무는 복사였다. 처음엔 80만 원의 월급을 받았다. 생활비가 부족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당시에 ‘열정 페이’라는 말이 젊음을 상징하는 말로 유행했다. 내가 받는 페이에 불만을 갖는 일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불만을 가지면 작가를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적은 보수를 받았지만 아르바이트가 아닌 첫 직장(?)이라 잘하고 싶은 마음에 열정이 넘쳤다. 언제 어디서든 전화를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한의원 진료를 받다가도 노트북을 꺼내 업무 전화를 받았다. 그때는 늘 거북이처럼 노트북이 든 백팩과 한 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월급이 100만 원으로 올랐고 일도 늘었다. 초대 손님을 모시는 코너에서 질문지를 작성하고 아이디어를 내서 대본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이었던 라디오 진행자는 나를 제자처럼, 딸처럼 아껴주셨다. 게스트로 많은 소설가와 시인들을 만났고 그들은 나의 연예인이었다. “좋은 질문 고맙다”며 얘기해준 게스트, 초대를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해준 게스트, 나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예쁜 이름이라며 칭찬해준 게스트. 그들에게 받은 격려가 내내 마음에 남아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막내 작가로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작가라는 호칭이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추억이 가득한 그곳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희롱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적당히 통통한 편이었는데 고정 출연자 중 한 명이 ‘꿀벅지’라 칭하며 만졌다. 그 사람은 다른 프로그램의 여자 프로듀서에게도 팔이 말라서 신기하다며 만져 봐도 되냐며 조물거렸다. 나이가 큰 아버지뻘 되는 그 사람에게 ‘오빠’라고 부르길 부추기는 사람도 있었다. “오빠가 널 참 좋아해” 당시엔 그런 일들을 호의로 웃어넘겼다. 당황한 내 눈에 비친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피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을 못 본 척했고 막내였던 나는 참고 견뎠다. 그 또한 나의 업무인 것처럼.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일이었기에 누군가에게 상의를 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바뀔 것 같지 않았고 그런 일 만큼은 내내 익숙해지지 않아서 결국 내가 먼저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본업에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볼 수 없었다. 방송가가 미투 때문에 떠들썩했을 때에도 그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 인생에 그런 사람은 두 번 다시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