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없는 자신감

by 블록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면접 때의 마음가짐은 ‘나 빼고 다 ㅈ밥이다’.

나는 특별한 학교에 가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또래 수준 이상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진심으로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별 거 없을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나 빼고 다 ㅈ밥이다'라는 생각에 한 톨 의심을 품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내가 했던 생각이 장도연 씨의 입에서 나왔다. 장도연 씨도 기가 필요할 때마다 '나 빼고 다 ㅈ밥이다'하고 주문을 건다고 한다.


자칫 오만해보일 수 있어도 효과는 항상 기막히게 좋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언젠가 무언가에 가로막힐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느끼고, 그렇기에 상황을 더 즐기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우물 안 개구리일 수는 없다. 세상 일이 녹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감을 가졌을 때 결과가 더 좋다는 건 익히 들어 아는 사실이다. 자기들이 똑똑하다고 들은 반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성적이 좋았다는 실험이라든지,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많은 자기계발서에 이미 나온 내용이다. 하지만 나처럼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게 아닌 이상은 ‘나 빼고 다 ㅈ밥이다’라는 주문을 완전히 믿긴 쉽지 않다. 나빼고 다 ㅈ밥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수학자 허준이 교수의 인터뷰를 봤다. 교수는 '자신감에는 근거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근거 있는 자존감은 너무 연약하고, 금방 깨져버릴 거라고. 근데 그럼 근거 있는 낮은 자신감은 어떨까.


내 전적부터 소개하자면 나는 1,2학년 성적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그러다보니 3학년을 시작할 때는 배우는 게 두려웠다.


잘하고 싶었다. 3학년을 졸업하고 석사 과정에 들어가려면 성적을 잘 받아야 하는 것도 있었고, 그냥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들이니까 이왕 배우는 거 잘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은 실패 때문에 자신감을 갖기 어려웠다.


나는 자신감이 없어야 할 근거를 조목조목 따졌던 것 같다. 1,2학년 공부를 대차게 말아먹었으니 아는 것도 동기들보다 적을 거고, 3학년 때 어떤 지식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동기들이 나보다 훨씬 똑똑해서 문제를 풀 때 나만 잘 못풀면 어쩌지, 다 아는 건데 나만 모르는 쪽팔린 상황이 오면 어쩌지, 하고 매 강의, 매 세미나가 걱정의 연속이었다. 과제로는 풀어야 할 문제들이 나오는데 한 문제를 시작할 때마다 막혀서 한 문제도 못 풀게 되면 어떡하지, 싶어 무서웠다. 1,2학년 때 과제가 안 밀렸던 학기가 없어서 과제가 밀리는 것도 무서웠다. 그래서 기본 태도를 ‘이거 정말 어려울 거야’로 두며 매사에 조심스러워졌다.


억울한 건 끝나고 보니 생각보다 쉬운 것들이 많았단 사실이다. 학년 말,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야 깨달았다. 문제는 풀 수 있는 난이도로 나왔고, 애들은 더 똑똑해보여도 고만고만한 것 같았고, 개념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무서워했던 ‘손대지 못할 문제’같은 건 없었다. 학년이 모두 끝나고, 더 이상 무서워할 게 남지 않은 상태가 되고서야 알게 됐다. 과한 걱정을 했다.


'아, 전에 하던 것처럼 ㅈ밥이라 생각했으면 더 쉬웠을 걸.'


더 순탄하고, 정신건강에 좋고, 시간도 절약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렇게 생각해도 됐을 것이다.


1,2학년 때 못했던 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핑계대는 것 같았고, 결과가 성적으로 낙인찍혀있었기 때문에 그 성적 이상의 능력을 믿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 어렵다고 생각하며 벌벌 떨었던 것이다. 떤다고 해서 나아지는 상황도 아닌데.


말이야 이렇게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면 근거 없이 날 믿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게 어느 면으로나 더 나으니까, 웬만하면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태도라도 내 안에 박아버리려고 글을 쓴다. 계속 돌아와서 읽고, 다 ㅈ밥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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