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받지 못한 꿈, 글쓰기로 다시 일어나 달린다.
상등품에서 벗어나 못 생겼지만 맛 좋고 저렴한 국내산 당근이 포장된 더미에서 발견해 한눈에 반한 두 다리를 가진 흙당근. 주황색 당근이 자신의 긴 다리로 마치 청바지를 입고 있는 듯한 모습에 울컥했다. 내게 몸과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인생의 쓰디쓴 실패를 안겨주었지만 여전히 너무나 좋아하는 청바지에 대한 그리움은 재미난 겉모습을 가진 당근과의 만남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며 다시 내 삶에 돌아왔다.
남들보다 늦은 대학 공부를 마치고 패션디자이너로서 입사한 회사에서 알게 된 데님과의 조우. 청바지를 사 입던 소비자에서 생산하는 입장이 된 상태로 알아가는 하나하나가 내겐 신비한 세계로의 초대였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이 아닌 사랑하는 대상이 된 데님은 생명을 갖고 스스로 움직이는 생물은 아니지만 목화에서 태어난 원단이 인디고 염료와 만나 푸른색을 갖게 되며 사람의 몸에 맞는 의복의 형태로 재탄생된다. 그 공정 속에 겪어야 하는 물과 온도와 햇빛을 통해 다채로운 빛깔로 한계 없는 변화를 거듭하는 데님의 물성은 어려서부터 갖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고 포기하는 걸 먼저 배워야 했던 인생을 산 나와는 정반대인 자신감 넘치고 뛰어난 재능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사람처럼 내게 다가와 단숨에 매료시켰다.
수술과 코로나.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은 내가 현장에서 데님 디자이너로서 일 한 시기보다 많은 방황의 시간을 살 게 했다. 장기간의 경력 단절 후 다시 용기를 내어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나는 몇 년간 방치해 두었던 브런치를 다시 시작해 글을 썼다. 틈틈이 지원한 채용공고에서 면접조차 보지 못하고 서류에서 탈락한 것은 불경기 속에 젊고 뛰어난 기량의 신입, 노련하고 유능한 베테랑과 달리 나이에 비해 경력이 보잘것없는, 잘 가꾸기에 실패한 나의 망한 커리어가 주는 뻔히 예상된 결과다.
멈췄던 글을 다시 쓰며 나는 분명해졌다. 여전히 청바지를 좋아한다는 것과 현재의 나로선 다시 업계로 돌아가 디자이너로서 일하기 힘들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버는 행운의 길에서 자꾸만 어긋나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이유를. 어쩌면 선택되지 않음은 더는 나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우쳐 완벽히 이해된 단념으로 부질없는 미련을 버리게 하려는 인생의 배려 일 수 도 있다는 깨닮음이다. 이루지 못한 꿈에 상심하고 애석하기보다 후회와 미련을 거두고 좋아하는 존재를 찾았던 최초의 기쁨을 상기한다. 가까운 동지로서 청바지와 함께 일 할 순 없어도 그것을 알고 떠올린 이야기가 준 행복에 지금도 유효기간 없는 애정이 샘솟는다.
나이와 경력도,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는 글을 쓰는 공간에서 이제 청바지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 남았다. 앞으로도 데님이 걸어갈 광명의 역사를 바라는 팬으로 내 마음을 담은 글에 쓰인 이야기는 사랑해 마지않는 존재를 향해 끝나지 않는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