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당신의 커리어는 점의 위치가 아니라 선의 기울기다

by 초마실

이번 인사 발령 명단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름은 '동철'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첫 출근날의 어색함을 함께 나눴던 나의 입사 동기죠. 평소에도 워낙 뜨겁게 일하는 친구였지만, 인사고과 직전에 마무리된 대형 프로젝트가 운 좋게 승진 시기와 맞물린 모양입니다.

게시판 속 그의 이름 석 자를 보는데, 묘한 조바심이 가슴을 찌릅니다. 오늘 동철이 찍은 회사 생활의 좌표는 분명 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 선명히 박혀 있습니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는데, 나만 뒤처진 채 그래프의 바닥을 기어가는 것 같아 온종일 마우스 클릭 소리조차 무겁게 느껴집니다.




엑셀은 현대 직장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도구입니다. 엑셀은 문자나 그림보다 ‘숫자’의 언어에 능숙하며, 그 숫자로 계산된 결과는 때로 백 마디 말보다 강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하지만 수만 행에 달하는 숫자 더미를 한눈에 읽어내기란 쉽지 않죠. 이때 막강한 지원군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래프’입니다. 그래프는 지난한 작업의 결과를 직관적으로 시각화해 줍니다. 마치 한 사람의 커리어를 한 장으로 요약해 주는 이력서처럼 말입니다.


영업 실적을 나타내는 꺾은선 그래프의 점들이 거칠게 요동칩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달, 바닥에 깔린 낮은 점은 모든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자괴감이 되어 마음을 짓누릅니다. 반대로 실적이 가파르게 상승한 달의 환희는 그래프의 테두리를 뚫고 나갈 듯 기세등등하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데이터가 쌓이면, 엑셀은 이 소란스러운 점들 사이로 하나의 선을 그려냅니다. 각 점과의 거리의 합을 최소화한 최적의 경로, 바로 ‘추세선’입니다.




절망과 환희 사이를 관통하는 정직한 선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추세선은 하루의 대부분을 모니터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네 삶과 꼭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실수’라는 오류 데이터를 생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뜻밖의 행운을 만나 ‘깜짝 실적’이라는 아웃라이어(Outlier)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추세선은 그 개별적인 점들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좌절의 나락이었던 낮은 데이터와 화려한 정점이었던 높은 숫자들을 골고루 아우르며, 우리 삶이 나아가는 본질적인 방향을 묵묵히 직선으로 그려낼 뿐입니다. 삶의 추세선은 결코 화려한 순간들만을 연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방황과 실수, 그리고 성취의 순간들 사이의 거리를 재고 그 사이를 가장 정직하게 관통하는 궤적입니다.




기울기가 증명하는 커리어의 진실

자료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지난 자료의 흔적이 만들어낸 추세선의 ‘기울기’는 내가 살아온 삶의 무게와 방향을 있는 그대로 증명합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는 회사원에게도 이 법칙은 유효합니다. 찰나의 환희와 길었던 좌절의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결국 ‘커리어’라는 이름의 축적된 기울기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의 실적이 바닥을 쳤다고 해서 너무 깊은 수렁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로 오늘 한 번의 성공에 취해 오만해질 필요도 없지요.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점의 위치가 아니라, 그 점들이 모여 만들고 있는 선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일희일비하지 않을 권리

지금 당신의 모니터 위에 완만한 우상향의 추세선이 보인다면, 입사동기 보다 성장이 조금 늦은 것 같다는 작은 흔들림에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됩니다. 추세선은 당신이 보낸 인고의 시간과 성실한 데이터들을 이미 모두 계산에 넣었으니까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당신의 데이터는 이미 정직한 기울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요동치는 꺾은선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당신만의 단단한 추세선을 믿으세요. 자료는 결코 당신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직장인에세이 #회사원 #퇴사고민 #김대리 #오피스라이프 #월급쟁이 #직장생활 #사무실 #출근길 #번아웃 #엑셀 #자료 #데이터 #커리어 #위로

이전 05화절대참조가 필요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