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의 소설가 최명희의 만년필 예찬
여러 언론인 및 작가의 만년필 예찬이 있지만
그 중에서 언론인 리영희 선생님의 사연과 함께
가장 맘에 들어하는 것이 소설가 최명희님의 글이다.
여기는 나의 글을 쓰는 '창작의 공간'이지만
오늘은 최명희님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 분의 글을 좀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기억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故 최 명 희(소설가)
저 아득한 옛날 인류 최초의 필기도구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깨어진 돌조각이나 뾰족한 나무 꼬챙이였을 것이다.
그 날카로운 자연물 촉으로 바위 암벽과 부드러운 흙바닥 위에다
무엇인가 새기고 그리던 원시시대로부터,
손가락 끝 느낌도 경쾌한 컴퓨터 자판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긴 세월 동안 이 필기 도구는 오만 가지 변화를 거듭했을 터인데.
새의 깃을 깎아서 만들어 쓰던 서양의 깃펜이나,
동양의 선비들이 문방사보로 아끼며 애지중지하던 붓들이
그 중 최근의 고전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제는 만년필까지도 아주 고색창연한
필기구가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아직도 만년필로 쓰세요?』
시인들조차 워드 프로세서를 두드려 작업하는 마당에
이게 웬 일이냐고 놀라며 묻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 나는 「아직도」 만년필로 원고를 쓴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만년필을 쓸 것 같다.
나는 만년필을 좋아한다.
먼 길을 떠나는 말에게 물을 먹이듯 일을 시작하려고
만년필에 잉크를 가득 넣을 때.
그 원기둥의 혈관에 차 오르는 해갈의 신선함.
그것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그리고 여러 해 묵어서 알맞게 눅은 원고용지 살 위에
만년필의 탄력 있는 금촉 부리를 찍으면,
마치 조선 백지가 검은 먹물을 흠뻑 빨아들이는 것처럼
온 몸으로 잉크를 받아 무늬를 놓는 글씨는,
육필의 문신이어서 서럽고 아픈 목숨들을 그립게 남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황홀하게 사로잡는 것은 만년필의 촉끝이다.
글씨를 쓰면서도 홀리어 순간순간
그 파랗게 번뜩이는 인광에 숨을 죽이곤 하는 촉끝은,
한밤중에도 눈 뜨고 새파란 불을 밝힌다.
그 비현실적인 금속성 광채가 얼마나 신비롭고 휘황한지.
나는 때때로 내가 본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 만년필 눈 아닌가, 찬탄을 금치 못한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온 밤을 새워
삭 삭 삭 원고지 위로 달리는 만년필의 촉 등허리 고단한 금빛이
어느 순간 푸르스름 변하는 그때이다.
나는 그 광경을 처음 본 충격과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새벽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남향진 창문 아래 책상을 놓고 일하는
나의 만년필 등허리로 미끄러지며 흐르던 새벽 이내, 그 찬연한 정기.
우주에 혼이 있다면 가장 깨끗하고 비밀스러운 첫 눈을 떠,
바다 밑같이 검은 창문에 푸른 비늘을 일으키며
사람을 깨우는 그 빛이 이러할까.
그 푸른 빛을 받아 업은 만년필 등에서 날렵한 촉끝으로 쏟아지며
또 다른 불꽃을 일으킬 때, 나는 우주와 만년필의 교감에 전율하였다.
그것이 곧 내가 쓰는 이야기와 진정으로 합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꿈 같은 소망이다.
그러나 요즘은 컴퓨터와 속도의 시대여서,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많이」 쓰고 「빨리」 쓸 수 있고, 정보를 「입력」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나한테 컴퓨터 쓰기를 권한다.
아마 나도 언제인가 컴퓨터를 쓰게 되겠지.
그리고 또 그때는 컴퓨터를 예찬할 것이다.
그러나 문득 한 번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이」 쓰고 「빨리」 써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사뭇 의아해진다.
너무 많은 것은 하찮아지기 쉽고,
너무 빠른 것은 놓치기 쉬운데, 인류의 역사에 무엇을 보태고자
우리는 그렇게 빨리 많이 써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의 삶은 보행 속도에 맞추어 살 때 가장 안정되고 알맞다고 한다.
그것을 넘어서면 몸이 시달리기 시작하는데
속도야말로 지금 우리를 편리하게 해 준다는 미명으로
가장 난폭한 횡포를 부리며
인간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문자라는 사양 산업에 종사하는 영세 수공업자로서
나는 기꺼이 아주 느릿느릿
이 현란하고 화려한 글씨의 호사를 누리려 한다.
남들이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버린 자리 뒤에 남아
이삭을 주우면서.
그래서 기도를 컴퓨터로 할 수 없듯이 도저히 기계로는 할 수 없는
그 어떤 조그만 구석지 한 칸에, 한 소쿠리 언어를 주워 담으며,
그 언어마다 빛나는 금촉의 광채를 한 자 한 자 새겨 놓을 수만 있다면.
이제는 구식이 되어버린 만년필의 새벽은 더욱 눈부시련만.
문득 어느 절창의 시 한 구절이 떠올라 가슴에 오래 남는다.
『너희들이 내다 버린 세상을 내가 가지마』
- 1995년 5월 20일 경향신문 정동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