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리뷰
*아래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출 ㅣ 오시마 나기사
출연 ㅣ 데이비드 보위, 사카모토 류이치
01.
Merry Christmas Mr.Lawrence
생소한 이 영화의 제목. 아마 '전장의 크리스마스' 보셨어요 하면 열에 열은 그게 뭐예요 하는 반응일 것이다. 당연하다. 국내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은 없다. 한국에서 개봉한 적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알지도 모른다. 'Merry Christmas Mr, Lawrence'이라고 설명하면 아마 알지도 모르겠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곡 중에서도 유명한 이 곡은 전주만 들어도 익숙할 것이다. 이 음악을 알고 있었지만, 제목을 한 번도 의심한 적도, 찾아보려고 한 적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영화관에 들어섰다. 영화의 원 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아트나인에서 상영한다는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예매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덜컥 예매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더 즐겁게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며 예매한 이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누가 나오는지 조차 찾아보지 않고 갔다.
1983년 개봉작인 이 영화는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영국군이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 들어가면서 그 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준다. 개봉당시, 칸 영화제 경쟁부문으로 초청된 이 작품은 한국에서는 개봉하지 못했다. 일본 문화개방 전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영화의 장면들이 당시 우리나라에서 개봉하기엔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몰랐다. 이 영화가 이런 내용인 줄.
02.
캐스팅과 연출
이 영화의 등장인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데이비드 보위, 사카모토 류이치가 주연인 영화. 이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서 본 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가수와 작곡가로 더 유명한 두 사람이 아닌가. 거기다가 기쿠지로의 여름으로 더 잘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까지. 처음 본 연기자로서의 그들의 눈빛, 대사, 행동. 자연스러웠다. 불편한 부분이 없이 금세 영화에 몰입하게 되었다. 영화의 끝에는 섬세한 연기와 행동에 감탄했다.
연출 자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여름의 자바섬. 그곳에서의 포로들의 생활과 전쟁의 이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색감 자체도 어느 작은 섬의 여름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낮엔 습하면서 축축한 그 모습이, 밤이 되면 새까맣게 높은 하늘에 별이 쏟아진다. 수차례의 낮과 밤. 포로들의 병동과 요노이의 집무실. 운동장과 감옥.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그들의 행동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모두가 똑같은 말을 속삭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포로 중 한 명이 죽자(큰 스포 아님) 셀리어스는 모두에게 꽃을 나눠주면서 추모한다. 그들의 추모 방식도 좋았다. 저항할 수 없는 포로라는 신분이지만, 그렇게나마 동료를 위로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셀리어스는 늘 그런 인물이었다. 전쟁 속에서도 저렇게 혼자 붉은 꽃을 들고 절대 꺾이지 않을 눈을 가진. 요노이의 눈에도 이런 셀리어스가 당연히 눈에 밟힐 수밖에 없다.
03.
Merry Christmas Mr.Lawrence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거나, 전쟁의 식민지를 주제로 한 영화는 꽤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일본군과 영국군 사이의 새로운 관계성을 조명하고 있다. 단순히 전쟁 상황에서만 성립되는 관계가 아닌 그 이상의 감정적 교류를 보여준다. 동성애적 요소가 있는 이 영화는 요노이와 셀리어스의 감정 교류를 대놓고 서술하지 않는다. 전장, 그리고 포로수용소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흔한 에피소드들 속에서 그들의 감정을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절제된 듯하면서도 마지막엔 결국 폭발하는 감정의 묘사를 통해 영화는 보다 섬세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 속에서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군의 무자비함은 기본이며, 그 속에서 암시하고 있는 새로운 관계성에 집중한다면 영화가 좀 더 색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셀리어스와 요노이인가?
'Merry Christmas Mr. Lawrence'라는 제목엔 셀리어스도, 요노이도 없다. 그렇다면 이 로렌스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가 표면적으로는 셀리어스와 요노이의 감정적 교류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지만(실제로 이 부분도 맞다) 실질적인 주인공은 아마 하라와 로렌스일 것이다.
하라와 로렌스는 초반에는 대립하기도 하고, 정확하게 상하관계를 유지하는 태도로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엔 전쟁이라는 상황을 뛰어넘어 둘은 좋은 친구가 된 듯하다. 특히나 크리스마스선물이라며 로렌스를 마음대로 풀어주면서 'Merry Christmas Mr.Lawrence'라 외친다. 술에 취해 웃으면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며 로렌스에게 선물이라면서 그의 누명을 벗겨 주고 위기에서 구해준다. 오늘밤은 자신이 산타라며 행복하게 로렌스를 향해 외치던 하라. 그 순간에 그들은 전쟁을 잊은 동료 같았다. 어쩌면 영화는 셀리어스와 요노이보다 로렌스와 하라의 숨겨진 감정이 무엇인지에 집중해 보는게 더 좋을 것이다.
'Merry Christmas Mr.Lawrence'이 대사는 마지막 부분에 한번 더 나오게 된다. 이 장면에서 하라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하라의 마지막 인사를 듣는 순간 최고의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 영화 중 손에 꼽는 엔딩이 될 것 같다. 그만큼 여운이 길고, 강렬했던 엔딩이었다.
04.
전장의 크리스마스
제목을 영어 원제 그대로 사용해도 되었을 거 같은데, 마지막 대사를 듣는 순간 번역 제목이 너무 아쉬웠다. 그 원제 그대로의 의미가 아주 큰데, '전장의 크리스마스'라고 붙인 것이 내심 아쉬웠지만, 전쟁 속에서도 크리스마스라는 낭만을 지켜내는 이들을 보면서 납득이 갔다.
전쟁 속에서의 이 크리스마스의 밤이 누군가에겐 선물이었다는 것. 하라가 외친 마지막 대사를 보면, 마치 우리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친 것 같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영화를 본 것이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크리스마스마다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다. 하라의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라는 이 말과 함께 흘러나오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노래. 그것만으로도 추운 겨울에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영화였다.
2024년 올해 이 영화가 한국에서 첫 개봉을 한다. 색다른 크리스마스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아마 여태까지 보지 못한 따뜻한 크리스마스 영화가 될 것이다. 매년 12월이 되면 꺼내보고 싶은 나만 아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