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탐하다 / 소설 · 에세이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는 현실의 인물이기도, 가상의 인물이기도 한, 한 아이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현실이자 가상의 이야기인 어떤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젠가 떠나버릴지도 모르는 잡다한 것을 좋아하는 아이. 그 아이로 정하자.
글과 기억,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이야기이다.
언제부터 글을 쓰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땐 부러지는 담배에게 표정을 넣어 금연 포스터를 그리고, 지구의 날 행사에서 지구가 아파하는 모습을 그린 후 상장을 받았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미술 학원을 다녔으며, 방과 후 활동으로는 주산암산, 가야금을 배웠다. 학교나 학원이 끝나면 해가 질 때까지 놀이터 흙바닥을 누볐다. 교복을 입기 전엔 공부보다 노는 것이 좋았다.
중학생이 되어선 예체능 활동을 전부 중단했다. 여느 중고등학생들처럼 입시학원을 다니고, 독서실을 등록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국어 시간에 자기소개를 작성했는데, 잘 썼다고 친구들 앞에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땐 어려서 부끄러웠는지 당당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 후, 국어 선생님에게 간택당한 것이 시작이었다.
학교 대표로 시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수필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게 된 것이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한 집단의 대표가 되어 대회에 나갔다. 물론 상은 받지 못했다.
1년 뒤, 같은 대회, 같은 분야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입상은 없었다.
중학교 시절, 학교에선 매달 꾸준히 글짓기를 시켰다. 양성평등의 날엔 양성평등 글짓기, 한글날엔 한글사랑 글짓기, 과학의 날엔 과학상상 글짓기. 매년 특별하게 이름 붙은 날이면 글을 써야 했다. 그런 날은 수업도 진행하지 않는다. 한 두교시정도를 빼고, 선생님들은 모조지 한 다발씩을 갖고 각 교실로 들어간다. a3 정도 사이즈의 똥종이. 그땐 그 종이가 너무 싫었다. 그렇게 큰 종이를 주며 반 이상을 꼭 채우라는 선생님의 말씀. 아이들은 고통스러워한다. 헛소리를 쥐어짜며 쓰는 아이, 소설을 지어내서 쓰는 아이 등 우리는 모두 그 시간을 힘들어했다.
처음엔 큰 종이를 채우는 것이 당연히 힘들었다. 그런데, 이 글쓰기엔 숨은 비밀이 있다. 어떤 주제든 특정한 공식 하나만 지키면 무조건 상을 탈 수 있는 비밀이다. 그래서 이 공식을 이용해, 3년 내내 대부분의 교내 글쓰기대회에서 상장을 손에 쥐었다. 물론 교내 대회는 선생님이 반에서 잘 쓴 사람 한 두 명을 추천해, 그중에 상장을 주는 방식이었다. (아마 선생님들도 다 읽어보기 귀찮아서 매번 비슷한 학생을 추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상을 받았고, 분량이 어느 정도 길다 싶으면 무조건 추천 대상이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교실 안에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중학생은 손에 꼽힌다. 보통 한 학기의 상장을 방학식날 모아서 주는데, 이를 잘 이용하면 한 번에 글짓기 관련 상을 3개나 받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최우수상으로 3개.)
그렇게 교내 글짓기를 통달한 후, 무서울 게 없었고, 교외대회에서 역시 기대를 했다. 하지만 2번의 실패 이후,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라이벌 아닌 라이벌이 등장했다. 선생님은 따로 불러, 다른 분야에 도전해 보면 어떻겠냐며, 수필분야 자리를 다른 친구에게 넘겨주었다.
정신 차리니 시조분야에 참가하게 되었다. 뜬금없이 시조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웃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선생님은 아마 미안해서 무슨 분야라도 이름을 넣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태어나서 시조라는 것을 대회 현장에서 처음 써보았다. 당연히 세 번째 참가 결과도 실패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중학교 3학년, 교내나 교외 대회가 아닌 글쓰기 자체에 더 집중한 시기다. 그 이유는 아마 친구 B 때문이었을 것이다. B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을 좋아했고, 자신 역시 글을 잘 썼다. 좋아했다. B와 나란히 앉아 서로의 글을 보고, 읽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아마 그 이후로 글을 쓰는 것이 더 좋아졌음에 틀림없다.
열여섯 살. 왜 그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까. 너무나 소중해서 깨져버릴 것처럼 조심하던 기억만 생생하다. 아직도 그때의 기분을 정의 내릴 수는 없다. 그때 우리가, 아니 내가 왜 그렇게 서로를 원했는지. 어쩌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너에게도 나와 같은 마음이 한 번쯤은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너를 만나는 것이 두렵다. 우리 사이에는 아주 얇은 유리판 하나가 세워져 있는 것만 같다. 이 유리가 깨진다면 우리가 평생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너의 생각은 잘 모르겠다. 나는 항상 혼자를 가두고 싶어 질 때면, 네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런 네가 가끔 나에게 연락이 오면 나는 애써 밝은 척을 한다. 사실은 너에게 참 많이 기대고 싶다.
아무도 날 위로할 수가 없는 시간이 있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기대지 않고도 너의 위로를 받는다. 신기하다.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잇었던 사람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없다.
- 2018년 성인이 된 후 B를 기억하며 쓴 일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