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사라진 순간

글을 탐하다 / 소설 · 에세이

by 푸른


B와는 가는 길이 달랐다. 애초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도 했고, 그 애는 어딘가 모르게 늘 훌쩍 떠나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을 쓰는 B, 영화를 자주 보는 B. 다 좋았다. 결정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는 꼭 그 애가 생각났다.


B는 매주 몇 편의 영화를 숙제하듯 해치웠다. 그때는 그 애 역시 나처럼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영화입시 때문에 학원에서 숙제를 받아한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그 애는 자신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이 열심히 글쓰기를 한 것도 그 애의 영향이 컸다. 그 애와 함께 주고받던 게 많았는데, 고등학생이 되니 잘 만날 수도, 연락을 할 수도 없어졌다. 새로운 학교와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점차 서로가 희미해졌다.


그러던 중 입학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연히 교외 글짓기 대회 소식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정독실 아이들만 참가 명단에 올라가 있는 대회였다. 정독실은 소위 공부를 잘하는, 전교 상위 몇 등까지만 속한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든 지금이든(사실 지금은 졸업한 지 오래되어 고등학교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 교내외 대회에 참가시키고 상을 준다. 내가 중학교 때 받았던 혜택 같은 것이 그 예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나의 성적은 평범했다. 첫 중간고사에서 전교 36등(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삼십몇 등이었던 것 같다)이라는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는 그렇게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었다. 초반엔 선생님들이 나에게 조금 관심을 쏟는 듯하다가, 나의 성적이 점차 떨어지자 더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 되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전교 36등이란 그런 것이다. 애매하게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그런.


확실히 고등학교는 중학교때와 달랐다. 반장, 부반장, 상장, 동아리, 선생님들의 대우, 생활기록부. 그 모든 것이 성적과 관련이 있었다. 이런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공부에 점차 손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그 교외 글짓기 대회에 대한 소식을 접한 것이다. 정독실 아이들에게만 몰래 전달되었다는 소식. 그들만 참가명단에 들어가 있다는 소식. 나에게 이 소식을 알려준 친구는 그 대회에 참가하면 점심에 돈가스 김밥 준대. 우리도 나가자. 라며 함께 담당 선생님을 찾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나와 친구는 마지막에 급하게 그 대회 참가 명단에 이름을 넣을 수 있었다.


몇 주 뒤, 교외 글짓기 대회 수상자 명단이 나왔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는 강북지역에 있었는데, 강북지역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입상자는 나 하나였다. 스스로도 좀 놀라운 결과였다. 동시에 정독실 아이들 이름만 몰래 명단으로 올렸던 선생님들에게 복수한 것 같은 기분이 제일 컸다. 선생님들의 태도도 잠시 달라졌다.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그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네. 하며 칭찬을 해 주셨다. 그런 칭찬들에 기분이 좋다기 보단, 그저 공부가 최고가 아니에요, 공부를 못한다고 다른 것도 못하는 거 아니니까 무시하지 마세요. 공부 못해도 다른 거 잘할 수 있어요.라고 선언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했었어야 했다. 물론 돌아가도 똑같겠지만, 공부는 열심히, 잘해 둬서 나쁠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고, 거기서 나의 글쓰기도 멈추게 되었다. 나름 공부를 한다고 글을 쓰는 것에 소홀했고, 그 소홀함은 글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게 했다. B와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으며, 나는 내가 쓴 글보다, 문제집에 있는 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만 했다.


3년간 제대로 된 글을 쓴 건, 아마 고등학교 1학년때의 그 교외 글짓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 있었던 교내 행사에선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상이나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에, 글을 쓰는 것을 완전히 멈추었다. 그땐 어려서 보상이 없이 무언갈 할 만큼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렇게 아무런 대가 없이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몰랐고, 내가 뭘 좋아하고, 열심히 할 수 있는지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모든 고등학생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나 고등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면, 진짜 ‘나’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방황이랍시고, 공부에 손을 놓고, 글에서도 손을 뗐다. 그렇게 3년. 인생에서, 나의 글쓰기는 나와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그땐 막연하게 넘겨짚은 시간의 의미를 몰랐다.




아주 더운 바람이 불었고,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작은 꽃씨들이 흩날렸고, 흙갈색 먼지가 시야를 흐리게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있다간 보이지 않는 공포에서 생겨날 두려움이 나를 덮칠 게 분명했다.


두려웠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어쩌면 스스로를 이 먼지 속에,

숨겨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180213 일기 중에서,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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