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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별 Dec 22. 2020

'그 섬에 가고 싶다...'

제주도를, 추억하다, 바라다


# 벌써 11년 


2009년이니 벌써 11년이 흘렀다. 어르신들 말씀처럼 세월이 참 빠르다. 

불혹을 넘어 이제는 지천명이 더 가까우니 나도 어른인가 싶지만.. 이래저래 아닌 것 같다.

철도 없고(이름에는 있다), 마음은 아직도 20대고(그래서 철이 없나보다), 

그러니 11년 전은 얼마나 어제 같겠나? 역시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하던 일, 공부, 모든 걸 그만두고 떠난 여행이었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잠수에 가까웠다.

도피라고 하기는 싫고, 어쨌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내린 결정이었다.

사실 스스로 한 것도 아니다. 아내의 권유, "가서 좀 걷고, 쉬다 오면 어때?"로 시작된 여행.


당시 제주도에는 올레길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만큼 게스트 하우스 수도 늘고.

2주를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정보를 듣고 익히고, 많이 떠들고 웃고, 많은 추억들도 쌓고 했겠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사실, 목적 없는 여행에서 삶의 목적을 다시 찾는다는 것도 웃기지만 말이다.


여하튼, 하루 일과의 메인은 '걷는 것'이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 마치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차처럼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웃긴 게, 항상 배낭을 메고 걸었다는 것이다. 원래 올레길을 걷는 여러 이유와 의미 중에 '인생의 짐'을 메고 걷는, 뭐 그런 것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때의 나는 꽤 진지하고 심각했던 것 같다. 하루 한 코스를 걷는 게 보통이라면 두 코스를 걷고, 발에 물집이 잡혀도 걷고, 비를 맞으며 걷고... 

그냥 걸었다.


 

그래도, 걷다 보면 좋은 게 많았다.  좋아하는 바다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제일 좋고,

산도, 오름도, 하늘도 좋고, 아기자기한 마을길을 걷는 것도 좋았다.

눈으로 들어오는 초록, 황토, 파란 색감들도 좋고, 어디 가나 쌓여있는 검은 돌들도 좋고,

얼굴을 만지는 바람, 뺨을 타고 흐르는 땀, 조금은 가쁜 숨까지 모두 좋았다.


하늘과 맞닿은 들, 그곳에 펼쳐진 갈대 사이를 걸을 때면 꼭 들어야 하는 곡이 있다. 기분 좋아지고 싶을 때

너무 잘 어울리는 곡, 김동률의 '출발'. 밝은 전주가 시작되면서 내 기분도 좋아지기 시작한다.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뭍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 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기억의 습작'도 그렇고 이 분 노래가 원래 제주도하고 잘 어울리나', 실없는 생각도 해 보고,

'원래 좋아하는 가수라서 <건축학개론> 따라 하는 거 절대 아닌데..', 누가 뭐라고 안 하는데 또 그러고 있고.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무슨 민망한 짓을 해도, 쓸데없는 생각을 해도 상관없다. 함께 걷는 갈대는 나보고

뭐라고 안 하니까. 그저 그 순간이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다. 

오랜 걸음으로 조금은 무거워진 발걸음도 괜찮고, 조금은 어두운 초록의 곶자왈 속에서 핸드폰이 터지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한만큼, 내 인생의 문제들도 다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니까. 


안다. 그렇진 않다는 거. 그래도, 그 이후 나는 매년 공백이 생길 때마다 그 섬을 찾았다.




# 충전소


완전히 번아웃되었을 때 찾았던 곳, 몸은 힘들었지만 머리는 비워갈 수 있었던 시간,

그래서 경직되고 망가졌던 마음이 조금은 회복될 수 있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고마웠던 것일까.


고향이 아니어도 제2의 고향, 또는 마음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곳이 있다.

가족처럼 나를 따뜻하게 받아주고 품어주는 곳, 언제든 돌아가도 되는 곳, 흔적이 남고 추억이 쌓이는 곳, 

매년 몇 번씩 찾았던 그 섬은 나에게 그런 곳이 되어갔던 것 같다.


한 해, 한 달, 한 주, 하루, 모두 길도고 짧은 시간의 단위이다.

그 단위 안에서 우리는 기쁘고, 감사하고, 슬프고, 좌절하고, 극복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기름이 가득 차 있고, 배터리가 90% 이상이면 문제없다. 든든하다. 아니, 신경 쓰지도 않는다.

빨간 주유등이 들어오고, 배터리가 40% 이하면 신경이 쓰인다. 계속 눈이 간다. 불안하다. 


그럴 때마다 찾게 된 섬은, 이제 나만의 동굴이자, 힐링 플레이스이자, 충전소였다. 

아직도 끝없이 뻗어있는 고속도로 같은 인생, 삶의 에너지가 소모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쯤,

중간중간 들렀던 그 섬은, 어디를 가도 좋았던,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필요한 나의 곳이었다.

     

최애 카페 2층에서 본 커다란 호를 그리는 바다(가운데) / 1층 정문에서(오른쪽)


어디를 가도 좋지만, 사람 많은 곳은 별로. 한적한 나만의 곳이 좋았다.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곳, 남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 고즈넉하지만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곳...


제주 섬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바다의 방위가 있다.

남쪽의 중문, 동쪽의 함덕과 김녕, 서쪽의 애월과 곽지.. 그리고 그들은 기호에 따라 방향을 튼다.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 빵을 좋아하는 사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 바다와 커피만 있으면 되는 내가 

오래전에 찾은 최애 카페는 애월의 해안도로 한 켠에 위치한 곳이었다. 


애월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한 때, 드라마나 유명가수 때문에 북적거리게 된 카페촌은 아무래도 찾지 않게 된다. 근처 지중해 느낌 나는 흰색-유리 카페도 이제는 유명해져서 아쉽다. 처음엔 몇 명 없었는데..ㅎ


제일 오래 그리고 자주 머물렀던, 아직도 찾고 싶은 나의 카페는 커다란 호를 그리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 하는 건 없지만


충분히 늦은 아침 일어난다. 아점을 먹고 마을길을 가로질러 걷는다. 날씨가 화창하면 더 좋다.

하늘이 짙은 파랑색일수록, 바다도 짙은 맑음을 보여준다. 에메랄드와 청록의 파랑으로~!


카페로 들어간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간다. 운이 좋으면, 아님 기다려서라도 통창 앞에 자리를 잡는다.

통창 앞도 왼쪽 자리가 좋다. 호를 그리며 펼쳐지는 바다, 그리고 밀당하는 파도의 결이 잘 보이니까..ㅎ


2층 통창 앞 내 자리(왼쪽) / 1층 안에서(가운데)


사실, 딱히 하는 건 없다.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시간이 좀 지났다 싶으면 리필과 케이크.

일단 펼쳐놓은 노트북,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지만, 검은 화면일 때가 더 많다.

제일 많이 하는 건, '멍...'


무엇을 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기에 상관없다.

그냥 가고 싶은 거고 그래서 가는 거다. 바다와 커피만 있으면 된다. 그거면 되는데...

              

몇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되었다.

한 해 동안, 한 번도 못 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을 향한    


'그리움', 

누군가를 볼 수 없을 때도 그렇지만,

어딘가를 갈 수 없는 때도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걸 확인하는 2020년이다.


친구가 보고 싶은 계절, 아니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냥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아니, 우리는 어쩌면, 북적였던 일상이 너무나 그리워서,

2020년 사계절을 통째로 저리게, 시리게 보냈는지 모른다. 

닿지 못하는 곳을 향한 간절함을 지닌 채, 매일매일을 견디고 버티면서 말이다...


오죽하면 목적지 없이 떠나는 여행상품이 몇 분만에 동이 났을까.

제주 상공까지만 다녀오는 여행, 그것조차도 귀한 요즘,

얼마나 가고 싶으면, 얼마나 보고 싶으면, 너무나 이해되는 풍경이다...


아직도, 언제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더 참아본다.


곧, 다시 자유롭게,

바다목장을, 모래사장을, 오름들을, 그 모든 땅을 내 발로 밟을 것을 상상해본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든 숨을 들이마시며, 기지개 켜는 모습을 꿈꿔본다.

당신도 그러고 싶지 않은가~?  :)


나는 오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 <별이의 별별 에세이>에는 생활 속 에피소드를 꾸준히 올릴 예정입니다. 편하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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