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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별 Dec 27. 2020

블랙 미러 시리즈 <샌 주니페로> 속 '디지털 천국'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짧은 소고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이번 학기 SF 영화를 보며 토론하는 수업이 있었다. 매주 작품을 정하고 핵심 주제 테두리 안에서 

‘종교-철학과의 대화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굉장히 다양하고 창의적인 질문들이 쏟아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머리는 아프지만 치열하게 고민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인터스텔라>(우주/외계 생명체), <레디 플레이어 원>(가상현실), <옥자>(유전자 조작), 

<아이 로봇>/<엑스마키나>(AI), <설국열차>/<컨테이젼>(환경/바이러스). 대부분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리는 작품들은 인간의 실수로 인한 환경파괴, 식량부족, 빈부격차를 미래의 모습으로 설정하고, 이와 함께 디지털 기술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여러 작품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신선하게 다가온 건 '블랙 미러' 시리즈 
시즌3 에피소드 <샌 주니페로>였다. 레트로 감성으로 시작하는 장면들, 그런데 볼수록 조금 이상한 전개와 민감할 수 있는 주제들,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관심, 흥미, 놀라움, 그리고 나중에는 복잡한 심정과 고민을 품게 만들었다.


'블랙 미러' 시리즈의 상징(아래)과 시즌3 에피소드 <샌 주니페로>(위)


OTT(Over the Top, 인터넷 기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대표주자 넷플릭스(Netflix)의 유명한 시리즈 작품 중 하나인 '블랙 미러'의 의도가 잘 반영된 에피소드 <샌 주니페로>가 내포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가상현실, 존엄사/안락사, 동성애, 사후세계.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뻔한 척하면서 어려운 질문은 다음과 같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천국은 어떤 곳인가, 영원한 행복은 가능한가...?  


(* 다음 단락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샌 주니페로'는 첨단 디지털 기술로 구현된 '가상현실'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시공간은 원래 노인들의 기억 속 추억의 공간을 재현함으로써 알츠하이머 치료를 돕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젊은 두 주인공도 사실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다.


불치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여인과 거의 평생을 침대에서 식물인간으로 산 또 다른 여인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곳, 모든 것이 가능한 마술 같은 곳에서 젊을 때의 모습으로 친구가 되어 사랑하며 행복을 누린다는 이야기. 아름다운 상상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던지는 ‘패스오버’라는 개념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한계에 다다른 자신의 육신에 대해서 존엄사/안락사를 선택할 때, 기억(과 정신(?))은 샌 주니페로라는 사후세계로 넘어가게 해 주는 기술. 물론 아직은 상상에 불과하지만, 실현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는 질문과 생각이 복잡해진다.


클라우드 속으로 존재가 넘어갈 때 영혼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신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은 단지 디지털 데이터인지 아니면 그 이상이 존재하는지, 정말 가능하다면 샌 주니페로는 영원한 디지털 천국인지..?!   


<샌 주니페로>에 등장하는 터커 사의 클라우드 '샌 주니페로'


실, 패스오버(pass-over)라는 단어 자체가, 작가-연출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종교적인 색채와 개념을 품고 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유월절'(pass-over)이라는 매우 중요한 절기의 이름이다.

 

이집트의 파라오 밑에서 400년이 넘도록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을 해방시키는 이야기(성서는 '출애굽기', 영화는 <엑소더스> 참고. 사실 두 단어는 Exodus로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신인 하나님이 선지자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 보내는 10가지 재앙, 그중에서 가장 무서웠던 10번째 재앙인 소위 '장자 죽음 재앙'에 패스오버가 등장한다.


파라오의 왕자를 포함해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이 죽던 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집 문에 칠했던 '어린양의 피'로 인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모든 집에 재앙이 임할 때 어린양의 피가 묻은 집은 넘어갔다(pass-over)는 이야기,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고 있다.


더 중요한 건, 그 이야기가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그로 인한 인류의 '구원'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얽힌 역사와 인물들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소설과 애니메이션 영화를 강추한다. 위대한 족장 중 한 명이었던 요셉의 이야기는 토마스 만 스스로 자신의 최고의 걸작이라 뽑은 『요셉과 그 형제들』, 이집트 왕자 출신 선지자 모세의 이야기는 <이집트 왕자>.



오랜 노예생활로부터의 구원이든, 인간이 오래전부터 꿈꿔온 유한한 삶 이후의 구원이든, 

'패스오버'가 공통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은 압제와 죽음이라는 것들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리고, <샌 주니페로>는 기술을 통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 기술을 통해 무한한 삶을 누리게 함으로써 구원을 이룬다는 설정. 다시 복잡해지는 머릿속, '가상현실의 삶이면 어때? '진짜'라고 느낀다잖아, 그리고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뭔데?' 등의 가능한 질문들.


가능할까 싶고, 말이 되지도 않는 것 같고, 어쩌면 종교인들에게는 개념 자체로 복잡하고 불편한 상상이다. 앞에서 언급한 '블랙 미러'의 기획의도에 따른 작품이기에 그러하다. 첨단 디지털 기술 발전에 대한 양면성, 부작용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들을 다룬다는 것.


그런데 필자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영상과 종교를 접목해서 글을 쓰고 강의하는 사람인만큼 비슷한 다양한 콘텐츠들을 더 많이 접하고 더 많이 불편해져야겠다는 생각, 그래서 더 익숙해지는 가운데 고민을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우리는 이 질문에 아직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걸 듣고 그런가 보다 한다. 그런데 그건 들리는 소리일 뿐, 나만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각자가 지닌 지식과 가치관에 등장하지 않는 현대 첨단기술과 이를 통한 기상천외한 상상들을 받아들이고 설명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준비를 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단 보고 비판을 하든, 판단을 보류하든,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것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는 천양지차인데 말이다.


가상현실 샌 주니페로 속 '터커 bar'


개인적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경직된 사회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해 온 생각이 있다. ‘영상’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에 대해서 너무 겁내지 말고, 배타적으로 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물론 모든 변화와 상상이 좋고 옳은 것이라는 건 아니다. 모든 내용을 수용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속에서 '너나 좀..'이라는 말소리가 들려온다...ㅡㅡ


중요한 건,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기준과 균형인 것 같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도전에 직면하며 살아왔고, 우리 각자 또한 그런 굴곡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는 걸 기억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흔들릴지라도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좀 어지러워도 힘을 내보면 어떨까.


‘만약’과 ‘아직은’이 아닌,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미리 겪음으로 고민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좋겠다. 좀 어색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아도 한 번 입어보면 좋겠다. 두려움이 아닌 치열함으로 함께 고민하며 그 속에서 아름답고 귀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려 노력하며 함께 살아가는 서로이면 좋겠다.

그렇게 같이 사고하며, 글을 쓰며,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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