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는 우리들의 변명에 대한 일갈
지난 주말에 박찬욱 감독의 최신작 <어쩔수가없다>를 보았다.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극찬과 함께 10점 만점부터 실망과 허무함으로 기분까지 망쳤다는 1점까지 다양한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어떤 영화일지 더 궁금해졌다.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영화는 지적인 농담 같았다. 알쏭달쏭한 퀴즈를 감독이 장면마다 숨겨놓고 관객인 나는 그 퀴즈를 풀어야 웃을 수 있는 그런 영화였다. 그저 행복하고 즐거워지려고 이 영화를 선택했다면 실망감이 앞설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평점이 극과 극이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양극단의 선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중은 정의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선과 악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선이 승리하는 이야기에 안정감을 느낀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주인공 만수가 악인이 되어 결국은 자신이 정해 놓은 행복한 가정을 다시 만드는 결말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분명한 건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주인공 만수가 점점 살인에 능숙한 악인이 되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 살인의 시도는 어설프기만 하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하고 살해 대상자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살인에서는 계획적이고 과감해졌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자신을 변명하고, 살해 대상자의 눈을 볼 수 없어 눈을 가리고 총을 쏘긴 하지만 머뭇거리지 않는다. 세 번째 살인은 좀 더 치밀하게 준비한다. 살해가 아닌 과음으로 사망했을 법한 상황을 연출까지 하면서.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영화를 보며 이 문장이 떠올랐다. <법구경>에 나오는 말씀인데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고.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영화에서 주인공 만수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되뇌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면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욕망으로 녹슬게 만들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극단적인 악의 행위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며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나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고 있다. 내가 좀 더 편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일회용품을 쓸 수밖에 없고, 경쟁에서 내가 이기려면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밞고 일어서야 하고, 내가 선으로 보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악으로 만들기도 하고, 나의 권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어쩔 수 없다는 변명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이번 주에 다시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통해 더 절실히 느꼈다. 우리가 당하면 정말 화나고 분노할 만한 상황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한 법정 스님의 글을 읽고 회심, 즉 마음을 돌이켜 나를 되돌아보았다.
스님은 자신의 탁상시계를 훔쳐 간 사내에게 돈을 주고 그 시계를 되사 온 일화를 이야기하며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 자신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며, 이 시계와의 인연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술회한다. 시계를 되찾는 과정에서 오히려 깊은 깨달음을 얻는 스님의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누구라도 분노하면서 도둑질한 사내와 다툼을 벌일만한 상황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남들이 탐낼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부끄러웠다는 말씀이 성스럽게 느껴졌다.
본래무일물!
本來無一物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뜻으로 우리가 세상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영원한 것도 없고 독립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물건이란 본래부터 내가 가졌던 것이 아니고,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떠나가기 마련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일에도 정해진 시기와 환경이 있다. 지금 당장은 누군가와의 이별은 아픔이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롭기만 하다. 하지만 만날 사람은 때가 되면 만나고, 일이 될 때가 되면 이루어지며, 헤어질 때가 되면 자연스레 헤어진다는 시절 인연을 이해하면 슬픔과 괴로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스님의 말씀처럼 인연 따라 있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있을 수 없다는 법정 스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이 좀 더 평화롭지 않을까. 앞서 말했던 영화 주인공 만수가 살인을 결심할 정도로 자신의 상황을 고통스럽게 바라본 것도 해고라는 상황 자체보다도 제지 기술 관리직은 내 자리라는 소유 관념 때문이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을 자신에게 세뇌시키며 악행을 저지르고 자신이 생각했던 행복의 조건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하지만 회사에서 그는 AI와 시스템 앞에서 언제든 대체되거나 해고될 수 있는 불안정한 존재이고 자신의 범행을 알고 있는 가족과의 평화로운 일상도 장담할 수 없다.
평화의 적은 어리석고 옹졸해지기 쉬운
인간의 그 마음에 있다.
또한 평화를 이루는 것도
지혜롭고 너그러운
인간의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이기보다는
인간의 심성에서
유출되는 자비의 구현이다.
우리는 물고 뜯고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서로 의지해 사랑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P.159
주인공 만수에게, 그리고 과도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법정 스님의 이 귀한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