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X <인간실격>

따뜻한 봄날, 가장 차가운 인간을 읽다

by 박소형


새싹, 꽃, 온기, 햇볕, 시작, 설렘, 기대, 희망, 긍정…

봄을 떠올리면 따라오는 단어들을 나열해 본다. 하나같이 사랑스럽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전히 봄이 오면 설렌다. 하지만 최근, 이 계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 <인간 실격>.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지만, 이 따스한 봄과는 어딘가 어긋나 있는 작품들이다.



음산, 비관, 우울, 불신, 거짓, 혐오, 음란, 불행, 냉혹, 외로움, 허무, 전쟁, 죽음…

이 두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다. 그래서인지 몰입감은 극대화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펼쳐 들고 싶은 마음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인간 실격>은 5년 전 여름휴가 때 단숨에 읽었지만, 그 충격으로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고 다시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최근 독서 모임에서 접했는데, 그보다 더 깊고 날카로운 불편함을 남겼다. 세 권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묶은 670쪽 분량임에도 지루할 틈은 없지만, 끝내 마음 한편에 무거움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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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작품이 독자에게 음습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두 작가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혹은 그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며 이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뒤 스위스로 망명했고, 다자이 오사무 역시 태평양 전쟁과 패망 이후의 공허한 시대를 통과했다. 그 시대의 공기와 상처가 작품 전반에 짙게 배어 있다.



전쟁이 남긴 참상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무엇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고 무엇이 픽션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화자의 서술 자체가 끊임없이 뒤집히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이처럼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세계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선택은 쉽게 공감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것이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하면, 단순히 비난하기도 어렵다. 결국 이들은 허무주의에 잠식되어 자살이라는 결말, 혹은 그것을 암시하는 지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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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이처럼 닮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두 작가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아고타는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던 반면, 다자이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사랑과 결혼 문제로 가문과 단절되며 풍요로운 생활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공산주의를 둘러싼 선택에서도 두 작가는 뚜렷하게 갈라진다. 전쟁과 체제의 폭력성을 몸소 겪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망명을 선택했다. 그녀에게 공산주의는 이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이었다. 반면 다자이 오사무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에 참여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는 단순한 이념의 차이를 넘어, 세계를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한 사람은 체제를 벗어나는 길을, 다른 한 사람은 그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두 작가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엇갈린다.



다자이 오사무.png <인간 실격>의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마지막 역시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 실격의 주인공 요조처럼 끝내 삶과 화해하지 못한 채 내연녀와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은 작품 속 허무와 절망이 현실로 이어진 비극적 결말처럼 읽힌다. 반면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작품 속 인물들과 달리 스스로 생을 끊지 않고 삶을 끝까지 견뎌낸다. 이는 절망을 응시하면서도 그것에 완전히 잠식되지는 않았던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며, 작품과 삶 사이에 미묘한 균열을 남긴다.



두 작가는 작품 속에서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지만, 삶에서는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린다. 그럼에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 <인간 실격>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세계는 분명하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경계가 무너진 인간 존재의 불안정함이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의심하며, 결국 무엇이 진짜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마치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모든 것이 흐릿해지는 순간 인간은 방향을 잃고, 끝내 스스로를 붙잡지 못한 채 무너져간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쩌면 이 책들이 유독 불편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인간의 본성을 너무도 집요하게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따뜻하고 밝은 이야기 속에서 위로받기를 원하지만, 이 작품들은 그 기대를 거부한 채 삶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쉽게 책을 덮을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불편한 독서야말로, 드물게 찾아오는 봄날의 설렘을 더 또렷하게 자각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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