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보고식 검사가 처방되는 이유
정신건강의학과는 방문하기까지 마음의 걸림돌 하나를 건너야만 하는, 마음의 어려움을 덜어내고 싶지만 정작 그 마음의 문턱을 넘어 진료까지 오기가 주저되는 곳입니다. 대체로 많은 분들이 정신과에 가면 어떻게 진료가 진행되는지, 바로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고 하지 않을까, 긴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들로 인해 정신건강의학과 방문을 주저하시죠. 그러면서 '누구나 이 정도는 힘들고 견뎌낼꺼야, 나만 유난한 건 아닐까?' 하며 자책하다가, '조금만 더 참아보자' 하면서 내원을 늦추게 되고, '진짜 이제는 못 견디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 내원하시는 편입니다. 그만큼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에서 방문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라고 해서, 일반 내과나 가정의학과 등의 진료 절차가 다르지 않습니다. 첫 내원인 만큼 신규 환자 등록을 하고, 어떤 어려움 때문에 내원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경험하는 주된 어려움이 무엇인지, 식사와 수면 상태는 어떠한지 등을 체크하는 문진표를 작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작성된 문진표를 가지고 정신과 전문의와 면담을 진행하고, 필요에 따라 검사를 처방받게 됩니다.
대부분 호소하는 어려움은 우울감, 불안감, 수면곤란, 무기력감 등등 이지요. 하지만 각자가 경험하는 주관적인 어려움의 강도와 수준을 파악할 수 없기에, 이를 측정하고자 심리검사를 실시합니다. 즉 주관적으로 호소하는 불편감을 객관적인 수치로 전환해서, 정상집단 대비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경험하는 상태인지를 측정하고자 실시되는 것이 심리검사입니다. 신체계측을 하는 인바디(inbody)에 비유하자면, 심리검사는 마음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인마인드(inmind)라 할 수 있지요.
현재의 우울감, 불안감 등을 간단하게 자기보고식 설문지(*환자/내담자 본인이 자신의 상태를 설문지를 읽고 체크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검사)를 통해 측정합니다. 우울감을 측정하는 경우라면, 그 정도가 경도 mild/ 중등도 moderate/ 고도 severe의 상태 중 어디에 속하는지, 우울감이 정서적/인지적 측면에 더 작용하는지, 신체적 반응으로 더 작용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임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자기보고식 우울 및 불안 검사는 한국판 벡 우울 척도, 한국판 벡 불안 척도입니다. 물론 이 외에 다앙한 척도들이 있으며, 환자/내담자가 호소하는 증상(ex. 공황, 불면, 외상 등등)에 따라 증상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들이 선별되어 실시됩니다.
이러한 자기보고식 검사의 가장 큰 장점은 실시가 용이하다는 점입니다.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만 갖추고 있다면, 실시 방법에 따라 자신에게 해당되는 설명에 체크하면 되니까요. 반면 문해 능력이 부족하다면 수행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가집니다. 자신의 정서적 상태를 인지하는 것이 제한되는 상태(ex. 인지적 손상 상태)인 경우에도, 문항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기에 수행이 제한됩니다. 더불어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평정하는 것인 만큼 증상을 과대보고 또는 과소보고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요. 물론 불성실한 검사태도 및 왜곡 반응까지 감지해내는 자기보고식 검사도 있습니다만, 이는 단일한 증상을 측정하는 검사가 아니라, 다면적으로 여러 증상들을 측정하기에 다르게 분류됩니다.
타당도 척도를 가지는 대표적인 자기보고식 검사는 다면적 인성검사(MMPI-2)로, 검사의 수행 태도, 증상의 왜곡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검사입니다. 이 검사에는 증상의 과장보고 및 과소보고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하위 지표가 있기에, 검사 결과의 신뢰도와 타당도가 보장된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다양한 증상들과 성격적 특성들을 측정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단일 증상에 대한 평가보다는 전반적인 정서적 상태와 더불어 성격적 특성, 그리고 정신과적 증상(psychotic sx.)의 유무를 살펴보기 위해서 실시됩니다.
자기보고식 검사는 실시가 용이한 반면, 환자/내담자가 얼마나 본인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솔직하게, 왜곡없이 응답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의 정확성이 달라집니다.
다만 환자의 현 상태에 대한 가설을 단일 자료만으로 가정하는 것은 위험하고 증상 또한 서로 상호작용하는 측면이 있기에, 자기보고식 검사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의 검사들을 동시에 사용하여 현재의 상태를 측정/비교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울감을 호소한다고 해도, 우울감과 불안감, 수면 증상을 평가하는 자기보고식 검사가 처방될 수 있습니다. 여러 검사들의 결과를 종합해서 좀 더 명확하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치료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자기보고식 검사는 현재의 시점을 기준으로 짧으면 24~48시간 기준, 통상적으로는 2주 또는 1달 동안의 증상에 기초하여 응답하기에, 스트레스 요인들에 의해 반응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적 상태를 측정합니다. 그렇기에 임상 현장에서 내원 당시의 심리적 상태를 빠르고 간단하게 살펴보기 위해 실시됩니다. 또한 약물치료의 진행에 따른 증상의 변화를 간단하게 점검할 때에도 사용하지요. 이걸 통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인 정서 상태를 객관적인 수치로 비교할 수 있게 되고, 약물을 조정할 수 있는 데이터로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자기보고식 검사의 경우에는 진료가 진행되는 중간 중간 여러 차례 실시될 수 있고, 이는 치료 효과의 점검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진료를 담당하는 주치의 선생님에 따라 다르겠으나, 자기보고식 검사는 진료 1-2회 시점에 보통 시행되며, 재검사는 증상의 호전 정도에 따라 최소 6개월 이내에 시행되는 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자기보고식 검사 외에 종합심리검사(풀베터리)가 시행되는 상황과 그 필요성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