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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장 수집가 Mar 22. 2022

아버지가 삶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날의 기억

7월의 마지막 주 며칠째 아버지의 단식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재활치료를 받고 나서의 일이다. 2주 동안의 시간 동안 희망의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이는 게 어려워지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호흡이 더 힘들어졌다. 몸의 상태나 호흡이 나아지지 않자 아버지는 퇴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부쩍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고 그 며칠뒤부터는 작정한 듯 식사를 거부했다. 여동생과 막냇동생의 걱정에도 아버지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다 소용없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아버지랑 같이 굶겠다고 말을 했고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식사를 시작했지만 그것은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기능들이 점점 약해져 갔고 약도 목에 걸려 가루로 먹어야 했으며 밥도 죽이나 눌은밥으로 해 드려야 했다. 나중에 방문간호사가 임종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냐고 물어왔다. 그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리고 8월 2일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은 여동생이 아버지를 돌보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 내가 아버지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날은 걸려오는 전화가 많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살짝 자리를 피해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래서 달려 나가 보니 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상태를 살폈지만 반응이 없었고 119에 전화를 걸어 무작정 우리 아버지 좀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전화기 너머 진정하라는 말이 들렸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모르는 사이 119 대원들이 도착을 했고 정신이 돌아온 아버지와 함께 병원 응급실에 당도하는 동안에도 나의 정신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부모라는 아빠라는 날개가 부러졌다.

응급실에 다시 몸을 눕힌 아버지를 살피는 의사의 표정이 어디선가 본 듯했다. 생각해보니 바로 처음 응급실에 오던 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던 그 표정이었다. 나는 와락 겁이 났지만 의사는 별다른 말없이 자리를 떠났고 기본검사들을 준비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응급실 침대 금속의 차가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고달픈 소리를 내는 대기용 접이식 철제의자, 살집 없는 아버지의 몸을 찌르는 날카롭고 온기 없는 주삿바늘, 의료진의 바쁨, 나의 조급함, 무언가 예고를 알리는 그림자들이 아버지와 나를 감싼다. 그날의 응급실은 퇴원을 기다리는 희망의 장소가 아니었고 죽음을 대기하는 장소였다.


나는 아버지의 살집 없는 육체를 만져봤다. 외로움이 만져졌다. 슬픔이 만져졌다. 고통이 만졌다. 그리고 두려움이 만져졌다. 내 체온으로 있는 힘을 다해 아버지를 쓰다듬었지만 살은 없고 뼈만 만져졌고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나에게 울지 말라며 아버지는 괜찮다고 말을 한다. 뭐가 괜찮은 걸까?. 본인이 아프고 괴로울 텐데 자식이 속상해하니 두려움을 숨기고 다 괜찮다고만 했다.


정말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는 동안에도 응급실에서는 저승사자들이 환자들의 숨을 걷어가고 있었다. 옆자리의 노인도 구석자리의 중년 여자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얼른 커튼으로 아버지를 둘러쌌다. 우리 자리까지 찾아올까 봐 무서웠다. 올 때마다 겪는 일이었지만 죽음을 지켜보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를 모시는 동안 총 4명의 죽음이 지나갔고 그럴 때마다 빈자리를 궁금해하는 아버지에게는 퇴원을 했다거나 병실을 옮겼다고 둘러대야만 했다. 이번이 5번째인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보호자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던 우리에게 의사가 찾아왔다. 중환자실로 옮길 예정이고 곧 안내를 다시 해주겠다고 하면서 '아버님이 잘 견디셔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라는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 '걱정이네요'라는 의사의 말이 맘속에 자꾸만 걸리기 시작했고 그 걱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머지않아 나를 찾아왔다.


처음에 왔던 의사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달아 의사들이 아버지를 살폈고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에게 눈짓을 보내왔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가더라도 연명치료의 수순을 밟을 수 있을 거라는 안내와 더 이상 차도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폐기능이 위험 수준에 이르러 가족들이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다며 사전에 논의된 이야기가 있냐고 물어왔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자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에 동의를 하면 일반병실에 가서 임종을 맞이하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심장이 터질 거 같았고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사인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처음부터 곁을 지켰지만 이 순간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나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뭐라 뭐라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싸인을 하고 원가족 단톡방에 상황을 알리고 오빠에게 엄마를 모셔오라고 했다. 화장실에 가서 우느라 한참을 자리를 비운 딸을 보자마자 아버지는 아무 데도 가지 말라며 손을 내밀었다. 사납게 달려드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예감한듯한 목소리였다.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은 채로 눈물을 흘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가빠지는 호흡을 체크하는 간호사들의 발소리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응급실의 침대 위에서 아버지가 삶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는 눈을 감은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못 해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만 되감고 되감았다. 나중에 고인의 귀가 제일 늦게 닫힌다는 말을 듣고 차라리 사랑합니다. 그곳에서 편히 숨 쉬면서 지내셔요라고 말할껄. 저희 곁에 와줘서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할껄. 후회만이 자꾸자꾸 나의 마음을 침범하고 질책을 했다.


이제  아버지는 다음 행선지인 다른 세상으로 퇴원을 하였으니 더 이상 침대 위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사실 응급실에의 기억은 아직도 드문 드문 비어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지켰지만 생각이 잘 안 난다. 아마도 기억하기 싫어서 지워버린 모양이다. 그날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원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럴 날은 없지 않을까 싶다. 부모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소란하게 울려대던 원가족 단톡방도 그날 이후로 잠잠해졌다.




혼자서 아버지의 병상을 지킨다.

혼자서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본다.

혼자서 아버지의 숨이 흩어져감을 본다.


혼자서 숨죽여 운다.

아무리 울어도

내 숨은 너무나 멀쩡하다.


<아버지를 보내고 응급실에서 태어난 짧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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