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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장 수집가 Mar 21. 2022

가정간호와 각자의 방식

힘겨운 시간이 일방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나 우리에게나 시골에서 움직이는 입원과 퇴원의 과정은 정말 녹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 퇴원부터는 시골집으로 가지 않았다. 위급상황 시 응급실로 와야 한다는 당부 때문이기도 했고 그 먼 곳에서 오는 시간 동안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일단 우리 집에서 가정간호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네 식구가 사는 집에서 아들의 방을 아버지의 공간으로 마련을 했다. 기존의 공간에 새로운 장비들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지만 병원의 가정방문간호 서비스부터 우선 신청을 해보았다. 


일정 보증금을 내고 방문 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다. 링거를 투여해야 하는데 링거 대가 없어서 벽에 있는 못에 세탁소 옷걸이를 걸어서 해결을 했다. 방안에 가정용 산소발생기, 선풍기, 공기청정기 그리고 돌봄에 필요한 수납장 등이 공간을 메웠다. 그냥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막연함이 현실에서는 정신을 못 차리고 우왕좌왕거렸다. 입원할 때는 기본적인 부분은 병원에서 체크가 되어 몰랐었는데 집에서는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니까 24시간 아버지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모든 주파수를 아버지에게 고정한 채 나의 동선을 정형화시켰고 아버지가 끙하는 소리만 내어도 내 눈은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하루 24시간을 그렇게 맞춤 케에를 하다 보니 나중에 아버지가 너는 언제 자는 거니? 밥은 언제 먹는 거니? 그러다 몸 상할라 하면서 걱정을 시켜드리기도 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아버지만 기운 내면 된다고 말을 하면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주름을 보며 울렁이기도 했지만 나의 체온을 나눠주는 거 말고는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2주가 어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많아지는 장비들로 인해서 제대로 된 공간을 따로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족회의를 열어 집 근처에 공간을 얻기로 했다. 다행히 길 건너 아파트에 월세로 집을 마련했고 여동생과 나 그리고 막냇동생 셋이서 아버지를 모시기 시작했다.


서둘러 아파트의 공간을 꾸미고 의료용 침대와 휠체어도 대여하고 드디어 우리 집에서 이동을 해야 하는 날이 되었다. 129 차량이 우리 집 라인 앞에 도착하자 신기하게도 어디서들 나왔는지 이웃들이 호기심을 잔뜩 장착하고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래? 어디여? 이 집 네식구만 살지 않았나? 우리집 사정을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웅성웅성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모여든 사람들이 허락도 없이 집 앞을 막 서성거렸고 몇 살이냐. 어디 아프냐. 코로나여? 하고 묻는 분도 있었다. 이곳 주민이 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친분을 맺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이사를 가고, 지금은 앞집, 아랫집 정도만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이웃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129 차량에 아버지를 옮기면서 그렇게 다른 이웃과의 안면을 터야만 했다. 평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자기 일이 아닌데도 잘 아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런 이웃들에게 관심 사절을 외치고 싶었던 날이기도 했다. 쏟아지는 궁금증을 차단하고 도착한 행복아파트 907호의 날들이 시작되었고 그날부터 우리 셋은 각자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모시기 시작했다. 


나는 불면 날아갈까 거의 갓난아기처럼 돌봤고, 여동생은 우리 셋 중 가장 씩씩했다. 요양보호사의 직업을 가지고 현장에 근무해서 그런지 아주 씩씩하고 가장 전문가다운 모습으로 케어를 했다. 직업에서 쌓인 내공이 느껴졌고 우리가 당황을 하면 환자에게 고스란히 불안이 전해진다며 우리에게 정신무장을 시켜주기도 했다. 


막내와 나는 그만큼 많이 의지했고 집에서의 간호는 여동생의 정성이 80%였다. 사실 입주 간병인을 채용할까 고민을 했지만 여동생이 다른 사람 손에 아버지를 맡길 수 없다며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로 인해 동생이 다니던 일을 급히 마무리해야 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돈을 지급하는 걸로 했지만 조카들과 제부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들에게 너무 큰 마음의 빛을 진 셈이다.  


막내는 제일 부지런히 각종 영양제와 필요한 기기들을 사다가 날랐고 아버지에게 좋을법한 모든 것들을 구해왔다. 특히 체력 손실을 막기 위해 운동을 시키는 건 막내의 몫이었다. 피곤하다는 아버지의 핑계는 그런 동생에게 통할 리가 없었고 그럴 때마다 '어허 막내가 아버지를 혼낸다. 큰애야 여기 좀 와봐라 '하면서 귀여운 투정을 하고는 했다. 나중에 유품을 정리할 때 그 물건으로 인해 우리 셋이 엉엉 울기도 했지만 막내의 간절함이 조금이나마 아버지에게 전해졌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곁에서 돌봐드리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마음을 다 채워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논. 밭의 곡식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를 걱정하고 그 농사채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지금쯤이면 뭐해야 하는데, 그거 잘못하면 안 되는데, 그거 엄마가 잘할 수 있으려나 하면서 하루에 몇 번씩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의 아버지가 너무 가여웠다. 


방에서 초록이들과 산책중


지금 이 상황만 아니라면 시골에서 하루 종일 나무와 꽃 그리고 논과 밭의 곡식들과 함께 했겠지. 온기 없는 아파트에 갇힌 아버지의 몸에서 외로움과 슬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급한 대로 스킨답서스를 투명 플라스틱 컵에 넣고 지끈을 연결, 벽면에 고리를 설치해 식물을 걸어놓았다. 다행히 방안의 초록이들이 아버지가 믹스커피를 마시는 동안 동무가 돼주었고 교감을 나누며 편안하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친구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 실린 신뢰감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서글프기도 했다. 혹여나 시들어 아버지 마음속에 찬바람이 일지 않도록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닦이면서 잘 자라줘서 고맙다고 그들에게 진심을 바치면서 굽실거렸다.  

부모의 마음처럼 


비록 자신의 의지로 본인의 집에는 가지 못했지만 날마다 꿈속에서 곡식들을 돌보고 왔을지도 모른다. 이제나 저제나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순이를 만나 동네 한 바퀴도 돌고 왔으리라. 아버지의 얼굴에 가끔 번지는 미소가, 편안한 숨소리가,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일러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버지 곁을 지키던 식물들은 이제 우리 집 벽으로 이사를 와서 둥지를 틀었고 지금까지도 나의 말동무를 해주는 중이다. 그 곁을 지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버지' 하고 불러보다가 '내 말이 들리려나' 혼잣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또 어느 때는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기도 한다. 나의 맘을 다 안다는듯 남보다도 더 열심히 부모처럼 나를 지켜주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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