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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장 수집가 Mar 18. 2022

행복과 불행이 포개지는 곳

반복되고 있는 입원 이번엔 6인실이다. 출구 쪽 침대로 아버지의 자리가 배정이 되었다. 창가였으면 좋겠지만 바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입원과 퇴원의 반복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커다란 여행가방을 열고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모습을 관찰하는 8명의 눈동자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스무고개 같은 피할 수 없는 그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결국 나는 익숙한 표정으로 돌림노래 부르듯 빠르게 해치우고 8명의 눈동자를 서둘러 해산시켰다.    

 

완치의 꿈, 아빠의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내 차례다. 짐 정리를 마치고 병실 내부를 쓱 둘러보았다. 보호자 중 4명은 여성 간병인이고 한 명은 부인 같은데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환자 6명 모두 폐렴으로 입원을 했지만 본래의 지병은 따로 있고 치료과정에서 발생한 합병증으로 호흡기 중증 병동인 이곳에 오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도 최종 진단명이 특발성 폐섬유화증이었지만 입원의 원인은 늘 폐렴과 기흉이었다. 다른 분들은 폐암 말기. 당뇨병. 신장투석등 합병증에 의한 폐렴이었고 대부분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이곳은 작은 사회이면서 동시에 감옥과도 같은 곳이다. 코로나 감염이 우려되어 환자는 입원한 층을 제외하고는 벗어날 수도 없다.   


안나 카레니나 책의 첫 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는 말처럼 이곳에서도 행복은 비슷비슷했지만 몇 평의 공간에서 삐져나오는 불행의 색깔은 다 제각각이었다. 환자 6명 간병인 4명, 보호자 2명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들과 매일매일의 병실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의 이야깃거리가 태어나고 축척이 된다.  


며칠째 되던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가 도착하기 전에 1층 편의점에 내려가서 컵밥을 사들고 들어왔는데 병실이 시끄럽다. 가운데 침대에 있던 갑돌 할아버지가 이제부터 밥을 먹지 않겠다는 말에 부인은 안된다고 옥신각신 중이었다. 할아버지의 단식투쟁의 원인제공자가 세명이었는데 한 명은 그분의 큰딸이었고 한 명은 부인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바로 나였다. 아버지와 나와의 특별한 애착관계는 반복중인 입. 퇴원으로 안면을 튼 몇 명의 간병인에 의해 카더라 통신으로 돌아다니는 중인 모양이었다. 화장실에서 마주친 그중 한 명에 의해서 이 병실도 한 바퀴 돌고 간 모양이었다. 갑돌 할아버지는 다 이유가 있다면서 나에게 와보라며 손짓을 한다.  


할아버지는 당뇨에 의한 폐렴으로 처음에는 큰딸이 몸이 불편한 엄마를 대신해서 있었다고 한다. 첫날을 보내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갑돌 할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도망을 갔다고 했다. 명희 할머니의 불편한 몸 때문에 본인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해서 화가 난다고 했다. 나를 바라보면서 딸이 옆에서 간호를 하니 얼마나 보기 좋냐며 나의 아버지가 부럽다고 했다. 부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큰딸이었던 거였다. 오늘 이전에도 나와 아버지를 향해 딸은 있어야 한다. 이럴 때 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냐. 이런 효녀에게 간호를 받으니 얼마나 좋냐 라는 말을 병실의 사람들에게  자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예의로 포장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은 미소보다 말이 먼저 나가고 말았다. 간이침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자야 하는 부인의 불편함은 보이지 않냐고 덜컹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받는 돌봄이 당연한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예의가 필요한 법이다. 그 안에는 존중이 들어있어야 한다.  딸과 아들의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나의 존재, 객관적인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너무 힘들었다.


명희 할머니는 한쪽 몸(왼쪽)이 불편했고 식사시간에도 한 손으로 식판을 들고 물을 따르고 갑돌 할아버지의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겨내고 있었다. 기린처럼 길고 하마처럼 큰 몸집의 할아버지를 덜 불편한 오른쪽으로 돌보면서 쏟아지는 피로도를 다 받아내고 있었다. 밤마다 쿵하는 소리에 잠을 깨곤 하는데 명희 할머니가 몸을 뒤척이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러려니 하고 잠을 청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의 눈과 귀는 아버지와 명희 할머니에게 24시간 열려있었다. 애초에 깊은 잠을 잔다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말고 다른 누군가를 더 보살피는 일에는 스트레스가 동반될 수도 있지만 명희 할머니만큼은 예외여야만 했다. 그렇게 퇴원 전까지 명희 할머니의 왼쪽 몸이 되어 주었다.   


부모이지만 갑돌 할아버지가 모르는 게 있다. 자식들도 다 각각의 사정이 있다. 고만고만한 상황에서 들춰지는 속내는 결국 핑퐁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결코 효녀가 아니다. 딸이라서가 아니라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맞다는 신랑과 아이들의 지지로, 입원 당시 직업의식이 부족한 간병인이 환자를 대하는 방식의 불편함을 목격한 이유로, 귀가 어두워 말수가 줄어든 아빠의 입과 귀가 되기 위하여, 처음부터 의료진과 소통을 했기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과정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을 모아야겠다는 나만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시간이 지난뒤 부모의 자리에 아버지의 부재를 채우고 싶었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남아있는 시간을 알지 못했다. 의사는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위해서라도 본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질문들이 모두 유언을 유도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든 게 나의 욕심인 줄 알면서도 첫 번째 여행을 갈 거야 그리고 두 번째는 말이다. 퇴원하면 하고 싶은 100가지에 대해 답을 하기 위해 얼마 남아있지 않은 숨을 쪼개고 또 쪼개어 말을 만들어주었다. 우리에게 아버지와의 기억을 선물로 남겨 주려고 말이다. 아버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선물이었다. 결국 다 채우지 못했다.


<갑돌, 명희로 표현된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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