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凡人)은 상상도 못할 왕관의 무게
'올 더 머니'를 보고 왔습니다. 나이가 무색하게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리들리 스콧' 감독님의 신작이어서 보고 싶기도 했지만, 초유의 사태로 인한 재촬영 때문에 그 결과가 더 궁금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기간 내에 개봉일 변경도 없이 뚝딱 작품을 수선한걸 보면, 괜히 거장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영화는 시작에 앞서 찬찬히 게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같은 설명을 통해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친절한 나레이션과 함께 말이지요. 그만큼 극 중 게티의 모습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헐리우드의 두 노장이 만나 일으킨 시너지는 생각만큼 극적이거나 타이트하진 않습니다만,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감도는 잿빛 화면은 아들을 납치당한 엄마의 심정만큼 답답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한푼도 내줄 수 없는 할아버지의 의중처럼 갑갑하기도 합니다. 게티는 부자가 되는 법보다, 부자로 사는 법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게티는 단순히 돈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본질에 대해 계속 말합니다. '돈주고도 못산다'라는 말의 저변에는 그만큼 비싸다는 뜻이 깔려있는 것처럼, 게티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게 납치된 사랑하는 손자이든, 희귀한 예술품이든 말이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한푼도 내줄 수 없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 그에게는 가능한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자의 목숨값으로 소득 공제를 하는 게티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게티에게는 그건 또 하나의 기회이자 방법일 뿐입니다. 손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거고, 소득 공제는 소득 공제이니 말이지요. 게티는 계속해서 자신을 황제에 비유합니다. 전생에 황제이었을 거라는 확신, 궁궐 못지 않는 대저택, 혈육에 대한 집착, 그리고 마지막 조각상까지, 그는 제국의 황제처럼 행동하고 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돈으로 쌓아올린 거대한 제국의 황제인 게티에게, 게일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존재입니다. 가장 믿음직한 돈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가슴을 베이고 속박당하면서도, 게티가 추구하는 가치에 계속해서 정면으로 반박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게일'은 게티라는 제국과 아들을 납치한 또 하나의 세력(이자 제국) 둘 다에게 맞서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게일도 없는 집 자제가 아니었습니다만, 게티 집안에는 학을 뗍니다. 어쩌면 그녀는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한푼도 줄 수 없다는 게티를 가장 잘 이해한 게티 집안 이외의 사람일 것이며, 가장 상처받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게티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배팅을 한 게일의 마지막 모습은 게티에게 먹이는 한방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끝내 이런 통쾌함도, 살아 돌아온 게티 3세에 대한 반가움도,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손에 쥐고 죽은 게티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뚜렷하게 내세우지 않은 채, 관객들의 시선과 판단에 맡깁니다. 시종일관 회색빛으로 담겨진 화면처럼 말이지요.
놀라웠던 것은 대타임에도 불구하고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연륜이 묻어나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극을 장악하는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명연기입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애가 일곱이더니 여기서는 손주가 열넷) 때론 품격있기도, 때로는 혐오스럽기도 한 게티의 양면성을 능수능란하게 담아내는데, 영화 전체보다 그의 연기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언제나 극 중 가정에 바람잘날없는 미셸 윌리엄스 또한 여전히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네요. 마크 왈버그는 전체적으로 보면 미스 캐스팅 같은데, 특정 장면을 보면 '디파티드'에서 보여준 연기를 기대하고 캐스팅한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올 더 머니'는 한 유괴사건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그런 영화입니다. 소재에 비해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장면도, 극적으로 쫄깃한 장면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괴물처럼 보이는, 괴물같은 부를 쌓은 한 남자의 일생의 한부분을 엿볼 수는 있었네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하는 그이지만, 어쩌면 게티와 제가 생각하는 '상식'이라는 개념이 다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 그래서 제가 부자가 못되는건가 싶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