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가난하다고 행복이 가난한 건 아니고, 부자라고 행복이 부자인 건 아니다. 행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 산비탈 외진 비교적 높은 지대에 오밀조밀 모여 사는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등에 두 살 된 만복이를 업고,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섯 살 된 장수의 손을 잡고 아버지 뒤를 힘겹게 따라붙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보다 더 큰 이불 보따리를 등에 지고 우리들 앞에서 길을 잡고 계셨다.
일곱 살이었던 나 김억만은 솥과 그릇들이 담긴 박스를 양손에 꽉 붙들고 서울 새집으로 이사를 한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모르고 마냥 즐겁게 부모님 뒤를 따랐다.
우리 집은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집의 위치가 높을수록 가난이 심했다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서야 알았다. 잘 사는 아이들의 집은 학교와 가까운 평지에 있었고 집의 높이는 삶의 형편에 따라 그 높이가 달랐다.
달동네 사는 사람들 집 주소에는 앞에 '산'자를 붙여 사용했다. 우리 집은 산 90-1 번지였다. 숫자가 높을수록 달과 더 가까웠다. 집들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달동네였다.
당시 서울에서 대표적인 달동네로는 강북에 삼양동이 있었고 한강 아래쪽으로 신림동, 봉천동, 흑석동이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도시빈민층의 주거 밀집 지역. 달동네는 1960년에서 1970년 사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한 사람들이 모여 주로 노동을 하거나 노점이나 행상을 하며 도시빈곤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버스에서 내려 비탈진 골목길을 몇 번을 걷다 쉬다 반복해야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산꼭대기였지만, 경치 하나는 최고였다.
우리 집에서 내려다보면 저 아래 무수히 많은 집들은 점처럼 보였고 불빛들은 물감을 찍어 놓은 듯 알록달록한 색을 멋지게 하늘로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 온 듯 예뻤다.
아버지는 아는 사람 소개로 달동네에 위치한 은행 청원경찰로 근무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허리에 총과 방망이를 차고 일하시는 모습이 멋있게 보여 나도 크면 청원경찰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퇴근을 하고 집에 오시면 연탄불 위에 올려놓으셨던 찜통에 물을 양동이에 담아 반 평도 안 되는 부엌 바닥에서 아버지의 발을 씻겨주셨다. 막내가 울면 등에 막내를 업고 하셨고, 막내가 잠이 들면 조용히 아버지의 발을 씻겨주셨다.
우리 집은 길에서 문을 열면 바로 부엌이 나왔고 부엌과 연결된 방은 창호지가 붙어있는 방문이 방과 부엌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나마 방은 바나나처럼 길어서 사과 상자 같은 옷 박스를 벽 한쪽에 쌓아 놓을 수 있었고, 이불도 보관할 수 있었다. 나머지 공간에서는 우리 다섯 식구가 잠도 자고 쉬기도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발을 다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시면 아버지는 발을 들어 엉덩이를 뒤로 물리셨다. 그리고 방 안에서 자고 있는 막내를 보시며 “우리 만복이 잘 자네. 당신 닮아 잘 생겼어. 나중에 복이란 복은 다 받아서 잘 살 거야.”하시며 작은 손을 잡고 흔들어 주셨다.
만복이는 그럴 때마다 연하게 웃으며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이것도 나중에 내가 커서 안 일이지만 만복이가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고 웃은 것이 아니라, 그저 어린아이의 옹알이였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이놈 봐라, 아빠 말을 알아듣네.”라며 좋아하셨다.
“조용히 해요. 아이 깨겠어요.”그때마다 어머니는 작은 밥상을 들고 들어오시면서 아버지에게 핀잔을 주시곤 했다.
아버지가 식사를 하시는 시간이 우리 집 저녁밥을 먹는 시간이다. 막내는 이불과 옷이 쌓인 벽 쪽에서 자고 있고 그 앞 쪽에 둘째 김장수와 나 김억만이 보리밥 한 그릇씩 방바닥에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작은 상에 올려 있는 김치하고 두부를 맛있게 먹었다.
밥상은 좁아서 어머니와 우리의 밥그릇은 방바닥에 놓아야 그나마 반찬을 상위에 놓고 다 같이 먹을 수 있었다. 반찬은 두 가지를 넘지 못했다. 늘 나오는 김치와 한 번씩 바뀌는 두부, 감자, 고등어 중 하나가 올라왔다. 운이 좋은 날이면 돼지고기가 들어있는 김치찌개를 먹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사를 하던 첫날, 일어서면 머리가 닿는 천정 아래쪽 벽면에 아버지의 사진을 제일 먼저 걸어 놓으셨다. 우리 집 기둥이 잘 계셔야 우리 다섯 식구 다 잘 살 수 있다며 신줏단지 모시듯 하셨다.
지금의 아버지는 왼쪽 눈동자가 안개가 낀 듯 흐릿하고 초점이 없으신데 사진 속 아버지의 눈동자는 하얀색 도화지에 검은 점을 찍어 놓은 듯 선명하고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웃집 사람들이 아주 가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아버지 사진을 보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 마디씩 하셨다.
“이분이 정말 억만이 아버지 맞아요?”그 사진은 내가 봐도 멋진 사진이고 어머니가 자랑하실 만, 하셨다. “우리 억만이 아버지가 충청도 시골 은행에서 경비를 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가시는 할머니 돈을 훔쳐 달아나는 남자를 보고 쫓아가서 잡았는데 그때 그 사람이 휘두른 칼에 눈이 찔려 실명이 돼서 지금 저렇게 되었지 뭐예요.”
“저런 큰일 날 뻔했구먼.”사람들은 저마다 그만해서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억만이 아버지 인물이 아깝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때 그 은행에 계시던 한 분이 진급해서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우리 억만이 아버지도 데리고 오신 거예요.”나는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온 이유를 그때야 알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셨다. 아버지의 다친 왼쪽 눈은 어머니에게는 훈장이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달동네 여기저기 순식간에 퍼져나갔 고 잠시 영웅이 되셨다. 달동네 영웅은 며칠에 한 명씩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했다. 그만큼 말도 많고 관심도 많은 곳이 달동네였다.
그러나 사는 게 퍽퍽하다 보니 그것도 잠시뿐 각자 삶의 무게가 영웅의 이야기보다 더 무거웠기에 영웅은 곧 사라져 갔다. 우리 아버지 이야기도 그랬다.
아버지는 퇴근 후 집에 오시면서 누른 봉지 안에 붕어빵이나 풀빵을 가득 사 오기도 하셨고, 가끔 호떡을 봉지 가득 사 오기도 하셨다. 빈손으로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
나와 동생은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렸다. 가난했던 시절. 그 시간은 하루 중에 우리가 유일하게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어머니는 언덕길이 끝나는 곳에 나가 우리보다 먼저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시는 아버지의 느린 걸음은 멀리 언덕 끝에 계시는 어머니를 발견하는 순간 조금씩 빨라지셨다.
“어휴~ 다 왔다.”비탈진 언덕길을 숨차게 올라오신 아버지는 가쁜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막내를 등에 업고 “어서 와요.”라며 환하게 반기시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으셨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하고 힘들었지?”
달동네 언덕은 황금빛으로 온통 물들어 있었고 집으로 향하는 두 분의 얼굴은 정겨운 웃음으로 넘쳐났다. “무슨, 당신이 더 힘들었지, 난 집에서 애들하고 놀았는 데......”손을 꼭 잡으시고 작은 집으로 고개 숙여 들어오 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에 커다란 행복을 하나씩 쌓아갔다.
두 분은 무척 사이가 좋으셨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밥그릇 속 깊은 곳에도 숨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식사하실 때마다 계란을 프라이해서 밥 속에 숨겨 주셨다. 가난한 시절 계란은 귀하고 비쌌다.
아버지는 언제나 바닥까지 그릇을 다 비우셨고,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밥이라고 칭찬하셨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행복해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곤 하셨다. 나는 두 분의 그런 모습을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는 매일 퇴근하시면, 우리가 오전에 어머니에게 배운 한글과 산수를 확인하셨다. 피곤하실 텐데, 어머니 가 아버지 발을 씻겨주시듯 아버지는 매일 우리의 공부를 봐주셨다. 동생과 나는 한 번도 무사히 넘어간 적이 없다.
늘 틀리고 꿀밤을 맞았다.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달동네에서 아버지와 공부를 하는 집은 몇 안 되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어머니는 떡볶이를 만들어 주셨다.
떡볶이 때문이라도 우리는 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보시며 흐뭇해 하셨 다.
“이놈들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하니 장하구먼, 우리 억만이 커서 뭐 될래?”아버지가 물으시면 나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처럼 청원경찰 될 거예요.”라고 했고 동생 장수도 옆에서 “나도 청원경찰 될 거예요.”라고 따라 했다.
아버지는 우리의 대답에 크게 웃으시며 “남의 것 도둑질하지 않고 성실하게만 살면 뭘 해도 좋다.”라고 하셨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달동네는 개발의 요지가 되어 달동네의 판자 집은 철거되고, 재개발되면서 빈곤층은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집은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그 후 달동네 사람들은 누구도 달동네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때는 어딜 가나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아버지는 달동네 청원 경찰이셨고, 우리의 영웅이셨다. 밤이 되면 제일 먼저 달이 보이던 달동네. 지금은 달이 금으로 바뀌어 금 동네가 되었지만, 나는 가끔 달동네 아버지의 꿀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