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7. 21

Tender is the Night

by 이븐도





피츠제럴드의 단편들을 좋아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까?

좋아한다. 밤은 부드러워,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제목부터 멋지잖아. 그런데 읽다가 때려치웠다. 서로를 꼬시려 드는지 아닌지 아리송한 유한 남녀의 느린 대화가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장면에서 넘어가지질 않아 관뒀다. 그래도 나는 그 제목을 놓지 못해 그 이야기를 멋대로 기억한다.



밤은 부드러워. 밤이 부드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번역이 기똥찼을 그 영문 제목을 살면서 때때로 떠올렸다. 그런 밤이었다. 부드러운 밤.


사실 별 것도 없는 밤.






어제는 퇴근 후 손바닥만한 집안 곳곳의 제습제들을 다 갈아치웠다. 오늘은 그 이전의 제습제들을 비롯한 쓰레기들을 갖다 버렸다. 이 쪼만한 집의 구석구석에 배치된 물건들을 보전하는 데 이만큼의 제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조금 자다가 일어나서 쇼핑몰에 도무지 안 입을 것 같은 옷을 담아 제출했다. 더 이상 살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 5년쯤 전에 나는 저런 걸 언제 입어보나 했던 상의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디자인. 입어봤다. 북유럽풍의 하얗고 깔끔한 피팅룸에서도 나는 감성 한 조각 없는 게임캐릭터 같은 모양새를 하고 서 있었다. 어깨로 사람을 다 때려부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이게 내 최선인가보다, 했다. 같은 디자인의 그 상의를 몇 개 샀다.


지하철역을 나오니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다. 머리가 다 젖었다. 달리기는 포기했다.




오늘은 다른 팀을 봤다. 오늘 입원해 내일 또는 내일 모레 수술이 예정된 애들. 내일 그 시간쯤이면 잔뜩 아파 울부짖을 수도 있지만 오늘까지는 멀쩡한 애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허둥거렸다. 출근길에 만난, 다른 병동으로 간 입사 동기는 메신저로 본인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새 근무화와 압박스타킹을 보내줄 나를 찾는다고 보냈다. 나는 그걸 컨베이어 박스에 넣고 빈 라벨지에 '나는 칼퇴할거다'라고 써붙여 출발시켰다. 그녀는 네 칼퇴하세요 선배님 했다. 그리고 나는 칼퇴를 못 했다. 응급실에서 열 시 반에야 애를 올려보내서.

올라온 애는 허연 각목 같았다. 네 살 짜리인 걸 감안한다면, 반토막난 각목.




친구는 연희동에 다녀왔다고 했다. 예쁜 사진들을 많이 찍었다고 했다. 본인 사진이 한 장쯤은 있을까 했는데 다 물건들이나 창틀 같은 걸 찍은 사진들이었다. 핀터레스트에 있을 것 같지만 아무튼 그녀가 직접 찍었으니 없을 그런 것들. 사진 속 정물이나 풍경들은 한여름 한국이 아니고 유럽이나 미국 어딘가의 카페나 인테리어샵 같았다.

같은 것을 봐도 그녀는 그걸 그렇게 찍을 줄 알았다.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다고 했다. 즐거웠나보다 했다. 어제, 어제가 무슨 요일이더라. 금요일. 좋았을 것 같았다. 나는 금요일에? 집안일을 하고 옷을 처분했다가 또 사고 나쁘지 않은, 아니다. 이제 생각하니 나쁜 데이근무를 했다. 연희동은 여기서 꽤 멀.. 지는 않구나. 언젠가는 같이 가볼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콘서트 때 홈마들이 잔뜩 찍은 사진들이 슬슬 살포되고 있는 와중에, 그녀의 최애 멤버 사진으로 본인의 휴대폰 규격에 맞는 배경화면을 만들어 달라며 챗지피티에게 부탁했다가 망한 캡처를 보냈다. 사진의 여백이 아니라 사람 이목구비 자체를 늘려 놔서 무슨 인간도 개구리도 아닌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콧구멍만한 잡지 스캔본 사진으로 혼자 배경화면을 만들어 쓰던 때의 짬을 살려 몇 장을 만들어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상당히 좋아했다. 그 잘생긴 얼굴을, 같은 사진을 오 분쯤 쳐다보면서 편집 아닌 편집을 하고 있자니 그의 얼굴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녀의 취향도. 똑같은 공연에서 건진 것들인데, 그녀는 정말 얼굴 위주의 사진을 골랐다. 귀엽고 잘생긴 게 좋아요, 라고 했다. 여기 안 그런 사람 있나요? 라고는 이따가 답장할 것이다.



데이식스 팬미팅에 간 동기는 모 멤버의 사진을 단톡에 보내면서 왕자님 같은데 실물을 못 담는다, 프로로 바꿀까 라고 했다. 나는, 중요한 건 화소가 아니라 이목구비라고 했다. 어차피 다 뚫고 나온다고. 사실 그녀의 최애 멤버는 다른 사람이었다. 근데 그 멤버 칭찬을 더 했다. 야, 너 그 사람이 강영현씨 버리고 결혼하자면 함?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 그러면 혼나, 라고 했다. 설마. 뭔소리야 누가 혼내는데. 했더니, 남자친구, 라고 대답했다. 아.

그리고는 한 술 더 떴다. 스물일곱 먹고 여기 간다 말하는 것도 솔직히 쪽팔렸다, 고. 가만히 있던 나까지 산 채로 죽인 거지. 오늘의 병원 저녁 도시락은 닭갈비 볶음밥이었다. 나는 거기에 5점 만점에 5점 준다는 멘트를 붙여 사진을 보낸 후 넌 굶으라고 덧붙였다. 자기 20대 초반의 전부였다고 할 때는 언제고. 행복하라는 덕담도 잊지는 않았다. 강영현도 김원필도 아닌, 만난 지 3주도 안 된 그 소개팅남과 말이지.



집에 와서는 복층에 처박혀 있던 래쉬가드와 수영복 반바지를 입어봤다. 그 땐 어땠더라. 모르겠고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하여튼 특별한 느낌은 당연히 없었다. 어제 산 크롭탑을 입었을 때랑 느낌이 비슷했다. 안전요원 같았다. 세이프가드. 나는 모든 옷을 그렇게 소화하는 재주가 있나보다. 이게 내 최선일 텐데. 짧은 미래에 비키니를 좀 빨리 입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별 거 없을 것 같다. 근데 정말 그게 내 최선일 것 같아 거울 앞에서 덧붙일 말이 없었다.






달리기를 했다. 한 시가 넘어서. 아무것도 없었다. 빨간불에도 지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열 명을 안 마주쳤다. 열 명은 더 됐나? 바라는 것도, 아쉬운 것도 없었다. 오늘의 달리기는 정말 오늘의 달리기였다. 사실 달리기도 아니었다. 아니었나? 다리가 아니라 어깨로 움직이는 것 같은 날이 있다. 안 힘들다는 말이다.


퇴근길, 1층 로비의 회전문을 여는 순간 확 체감되는 오늘의 습기. 늘어져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그 새 열기가 식었다. 식은 후 적당한 물기에 녹은 공기가 편안했다. 노근하고, 그만큼 부드러워 슬쩍 더해진 무게. 가만히 서 있자니 좀 부담스러워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밀도. 밤은 부드러워, 의 그 밤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무 일도 없고, 없겠지만, 이대로 있기에는 아까워 뭔가 일을 쳐야 할 것 같은 느낌.




나는 멋대로 그런 걸 기대했으나 자기 잘난 이야기만 아닌 척 겨루는 그들의 대화가 장벽이었다. 보통 그런 현장에는 어떤 긴장감이 있기 마련인데, 도무지 안 느껴진 탓에 그 거북스러움을 견뎌야 할 이유를 잡아내지 못했다. 이 공기처럼.


한밤중. 나무의 땀냄새가 짙게 났다. 호수. 잔뜩 모여 있는 연잎. 어두운 하늘보다 더 시커먼 나무들. 가로등, 드문드문 켜진 조명에 비친 그 뜨끈할 수면, 거기 부담스레 모여 있는 둥글게 넘실거리는 것들. 애매한데 으스스하고, 동시에 좀 더운가 하면 젖은 등과 어깨에 바람이 불기도 하고. 현실의 애매함. 더움과 시원함의 사이. 뜨거움과 따뜻함의 사이. 미지근하나 밀도는 성기게 들어찬 느낌. 아무 생각이 안 드는 노래들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움직였다.




그러다 한 남자가 나를 지나쳐 잔뜩 달려나갔다. 혼자 연잎 목욕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뛰던 내 뒤를 비겁하게 지나친 것이다. 약이 올라 잔뜩 뛰었지만 결국 지쳐서 거리는 멀어졌다. 열받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일수록 오래오래 그 속도로 뛴다는 점이다. 야장이 모인 아래쪽으로 오니 그의 자취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차지 선생에게 기록의 비결을 물었더니 꾸준히 하라고 했다. 즐기라고 했다. 그러더니, 레슨을 받는 것도 좋다고 했다. 레슨요? 숨 쉬는 법이라도 가르쳐 주나. 자세 교정을 해 주고 또 뭐라더라, 하여간 유용한 포인트들을 잡아준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레슨까지 하면서 달리기를 하라고? 레슨? 나는 오늘의 달리기가 좋아서 했다. 아직은 레슨이 필요할 때는 아닌 것 같았다. 비록 그 남자가 열받았지만.




법원과 굴다리 등등을 지나 오피스텔이 위치한 횡단보도에 섰다. 그러니까, 시꺼먼 수풀과 생선마저 어두운 수조 안에서 잠이 든 광경과 불 꺼진 빌라와 꽃집과 옷가게와 배스킨라빈스를 지나 그 밝고 넓은 곳에 다다르자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여기가 내 집이구나.

혼자 지낸 지 8년이 지난 여기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도 없던 상태가 멈췄다. 콘서트장에서 여섯 번을 떼창한 노래가 나왔다. 앨범 수록곡 중에 가장 좋아했던 건데, 이제는 그런 추억이 덧붙어 버렸다.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했다. 깔끔하게 좋아만 하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야. 좋은 건데 왜 안 좋기도 해? 나도 몰라.




연애라. 연애. 모르지. 애인이 있다면, 이런 평화로운 밤이 있었을 수 있을까. 위험하다고 싸웠겠지. 아니면, 나 잘게. 같은 카톡을 확인하고 숙제하듯 답장을 보냈을까.


부드러운 밤이다. 안정. 이 밤이 나에게 그랬다. 떠오르는 것도, 고인 것도 없는 밤. 언제나 인생은 잡동사니 가득한 서랍을 헤집어 또 정리하는 일들의 반복 같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 왜? 몰라. 모르나?

오늘 봤던 환자가 안 속시끄러운 애들이라서. 그 습기에 뛰느라 땀을 흘려서. 콘서트의 여운이 조금 옅어져서. 여름이라서. 눈 감았다 뜨니 7월 말이라서.




부드러운 밤이다. 아무리 곱씹어도 폼 나는 조합이다.

텐더 이즈 더 나이트.

지나갈 것. 시간. 애매함. 듣기만 해도 잠이 오는 평화로움. 온기, 습기. 밀도.


오늘이 다 지나간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