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이라는 허울 좋은 말.
나는 번아웃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 집에서 컸다. 우울은 게을러서 오는 거라고. 그래서 아빠는 맨날 뭔가를 읽고 쓰고 정리하는지도 몰랐다. 게으름, 그러니까 그 비어 있는 사이에 스미는 것들이 두려워서. 실상 그 기저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긴 하지만. 집에 가면, 어떻게 삼십 년이나 정신병에 안 걸리고 한 직장에서 일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못 갔으니 기각. 대충 대답도 예상 가긴 한다. 아마 언젠가는 물어봤을 질문일지도 모른다. 너희들이 있으니까 일했지. 정수랑 성준이랑 엄마랑. 아니면, 그럼 어떡하냐. 해야지, 아닐까.
아빠의 오춘기가 한창이면 후자일 것이고 질문받은 시점이 살짝 거기서 비껴나 있으면 전자일 것이다. 아빠의 대답은.
오프 때 피곤한 건 답이 없다. 차라리 출근하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뭐든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씻고 머리를 말리는데도 졸려서 고개가 꺾인다.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오늘은 나 노는 날인데. 얼굴에 선크림까지 다 바른 뒤에야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씻고 눕는다. 그런데 낮잠도 못 잔다. 잠이 안 와서. 졸린데, 기운이 없는데 잠이 안 온다. 정리 안 된 서랍처럼 뭔가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이라서.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쓰레기도 버린다. 안 입는 옷도 오늘은 정말 종이가방에 모았다. 이제 더 할 일이 있나? 나는 마음이 별로일 때 뭔가를 버렸다. 버리고, 지우고, 정리하고. 빼고, 빼고, 빼고. 더 빼고. 갤러리, 검색기록, 구독목록. 정말 더 이상은 온라인에도 오프라인에도 정리할 게 없는데도 잠이 안 온다. 사실은 그러고 나니까 한 나절이 갔다. 그래도 할 일은 계속 쌓인다. 카톡, 알림. 또 카톡. 언젠가는 그 배달 문자 오는 게 싫어서 택배도 안 시켰었다. 그게 무엇이든. 문자 확인하는 것도, 쓰레기 버리는 것도 일이라서. 안 궁금한 단톡, 지나갈 이야기. 정서적 지지. 내가 못한 일들.
언제나 그 기로에 서는 느낌이다. 나한테는 불행할 게 없었고 우울할 이유도 없으니까. 번아웃? 사치스러운 소리 아닌가. 난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하지 못할 사유 같은 건 없는데. 팍 쉬든지 재밌는 뭐라도 찾아 나서야 하는 거라고. 2천만원을 잃은 건 정말 그 무엇에도 사실 비견하기 싫은 상실이지만. 그것 빼면 정말 나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게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몸이 아픈 건 더더욱 아니고 오늘은 노는 날인데. 근데 옷까지 다 입었는데도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미끄러질 뻔한 거면, 좀 문제가 있긴 한 거지. 문제는 그게 사실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거지만. 늘어져 있을 시간 같은 거 없다고.
달리기도 빼기의 일환이다. 나는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정말 딱히 언급할 것도 없는 별볼일 없는 삶. 사실은 후자가 더 맞다. 그런데 이 별것 없는 삶을 사는 데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었다. 빼기 빼기 빼기 빼기. 월급받는 만큼의 스트레스만 받으면 될 것 같은데 내가 하는 꼴을 보면 나는 이것보다 더 받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역량이 딸리는 거지, 이 일을 하기에.
달리기가 없었더라면 나는 진작 퇴사했을지도 모른다. 상반기에 뭘 했나 떠올려 보니 달리기하고 일한 것밖에 안 떠올랐다. 좋아서도 있지. 좋아서 한 건데. 선후관계가 좀 틀어지긴 했다. 그렇게 안 힘들었다면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달리러 안 나갔다. 굳이굳이 글로 써서 마음을 정리하고, 달리기해서 몸이며 마음이며 같이 기운을 다 빼놓고.. 시간 없는데. 정리를 위한 활동 말고, 좋아서 하는 걸 이제 또 찾아야 하나? 근데 고작 십 개월 됐는데. 뭐 평생 한 줄 알겠어. 누가 보면.
우울해질 때 드는 생각이다. 나는 왜 별 것도 아닌 걸 이렇게 열심히 하도록 난 걸까. 그러니까, 왜 똑같은 결과를 내려면 몇 배는 더 애써야 할까. 그러니 힘들지. 타고나길 힘이 없어서. 이제는 나한테 재능이 있나 없나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은 안 한다. 그냥 해야 해서 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냥 생활의 한 조각이 되었다. 근데 어차피 인생도 그런 거 아닌가. 나한테는 그런가? 기운이 없다. 없는 날이다. 살기 위해서 빼고 또 빼고 또 빼고.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되게 건강하게 사는 거기도 한데.. 모르겠다. 건강한가? 건강하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서 최대한으로 사는 것 같긴 해.
아무튼 체력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오늘은 없다. 덕질도 이제 때가 된 건가 싶다. 왜 휴덕합니다,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런 날도 다 온다. 다음 주 콘서트인데.
표 다 취소하고 싶다. 근데 늘 그랬나? 항상 바닥을 찍을 때쯤 공연을 보러 갔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사실 어디서도 중요한 사람이 아닌데 왜 사는 건 이렇게 기운이 빠질까. 내가 되게 중요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처럼.
좋겠다. 아이돌들. 뭔 말만 해도 사람들이 오구오구 해주고. 정말 사랑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걸 알려나 모르겠네.
이게 이런 식으로 보이면 정말 끝난 건가? 모르겠네. 하하.
나는 언제부턴가 아프다는 호소가, 힘겹다는 말을 받아주기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다. 나도 이렇게 사는데 니가 감히 힘들어? 하게 되는 것이다. 실상 까보면 별 것도 없으면서. 이게 번아웃인가? 아닐걸. 그런 단어로 스스로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그럼 해결 방법이 없어져 버린다고.
안 아프잖아.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들 기억나지. 난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고, 아직은.
한편으로는 남의 힘든 얘기를 잔뜩 듣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 이렇게 산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서.
그들도 나와 같이 별볼일 없는 생을 힘껏 살고 있잖아.
그리고 이런날도 저런날도 있지, 라고 마무리하는 거지.
그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