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과 맨시티와 FC 바르셀로나
어떻게 고르는 거지.
왜 좋아할까.
355ml에 0kcal.
부서 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회식이 잡혔다. 나는 나이트 핑계를 댔다. 그런데 내가 사원님 선물을 샀기 때문에 가서 얼굴은 비춰야 했다. 이미 좀 취한 사람들이 소맥을 한 잔 말아줬다. 수쌤이 미쳤냐고 했는데 차지쌤이 강권해서 한 모금 마셨다. 맛있었다. 하지만 나는 출근을 해야 했다.
술집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 이런 데가 있었다니. 친구 불러서 오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 동네는 노는 날 환승만 해도 기분이 좀 그래. 리버풀 팬인 사람이 하는 술집이었다. 빨갛게 걸린 팀 휘장에 멋진 문구가 쓰여 있었다. You'll never walk alone. 왜 저게 저기 쓰여 있게 됐을까 생각했다. 어쨌든 붉은 천에 팀 로고와 함께 영문으로 박힌 글자가 좀 멋있었다. 아주 살짝 취해서 그래보였을지도. 맞긴 했다.
병원 바깥에서만 보면 적응 안 되게 나에게 칭찬을 부어주시는 사원님들과 간신히 뻘쭘함을 참고 내가 뭐라도 웃긴 짓을 해주길 바라는 애들 표정 사이에서, 제일 웃겼던 건 집 냉장고에도 있는 그 제로콜라였다. 펩시제로콜라. 어떻게 355ml나 되는데 0kcal일 수가 있지. 혁신 아닌가.
그럼 물은?1톤을 먹어도 0인데. 아니야, 0이 아닐 수도 있지. 제로. 저 시꺼먼 색만큼이나 거대한 음모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 어떻게 355ml나 되는 저 달고 시원한 것에 당류도 열량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거지.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그 자리의 콜라 캔이 웃겼다.
회식은 즐거운 이벤트임이 틀림없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면. 나는 작년에 사회를 봐야 했다. 술이 약한 나는 애진작 맥주 한 잔을 다 마시고 얼굴이 발개진 채로 경품 추첨을 하고 사람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주고 수선생님 등등의 인물들에게 치대는 등 자발적 광대가 되었다. 즐거웠다. 그 사람들도 즐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최선을 다했다. 피곤해서 문제였지. 아주 못 쓰는 정신 상태도 아니었지만 맨정신으로는 못 한다. 그러니까 왜 나한테 시켜요.
그런데 올해도 또 시킨다고 했다. 싫은데요, 했더니. 시키면 하는 거지 누가 바로 싫대요, 그래. 아, 싫어요오 작년에도 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면 되지. 싫어요, 민서야 너 할래? 했더니 그 신규는 시끄러운 그 말소리에 벙찐 표정을 짓다가 어쩌다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됐다.
어, 난 그냥 말한 건데. 야, 나 태운 거 아니다? 보셨죠? 야. 이게 태우는 거지, 가서 찔러. 가서 말해, 민서야.
사회자라, 지금부터 맡아 놔도 난 어차피 못 한다니까? 그 때쯤이면 정말 딴 부서에 있을 것 같아서. 술집에서는 패스트리 도우를 쓴 피자를 팔았다. 맛있었다. 늦잠 자서 어쩔 수 없었다고 구라를 쳤지만 동기들조차도 어차피 반만 믿었을 수도 있다. 가려면 갈 수 있었지. 다섯 시 반? 그러면 오직 그 고기와 사회생활과 피자와 있는 화제 없는 화제를 다 끌어내 분위기를 맞추고 웃어야 하는 그 일을 나이트 시작 전 네 시간이나 해야 한다는 거야? 잠까지 줄여서? 에바지, 에바다.
몇 시간 동안 머리 풀가동하고 텐션 높인 채 사회생활과 진짜 재미 사이를 줄타는 거랑, 혼자 달리기하고 그냥 출근하는 거? 닥후 아닌가. 소고기 필요 없어. 패스트리 도우로 부족해? 금가루 뿌려줘? 피자에 다이아몬드를 뿌려도 싫다. 아, 다이아는 좀 갔고. 그냥 집에서 멸치볶음에 밥 먹을래.
수쌤은 항상 즐거워했다. 같은 기수끼리 아웃백에 갔을 때도 우리 사번과 갔을 때를 제일 좋아했다. 나는 감히 생각한다. 내가 꽤.. 애를 썼나보다, 하고. 그러니까 나와 내 동기가. 대가리 아프다. 윗사람한테 해가 안 갈 정도로 까불며 예의 차리고 애교도 떠는 거. 몹시 골이 아프고 피곤하다. 집에 와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건 덤이지. 그래서 간간히 계속 치대야 한다. 선생님,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하면서.
나는 다섯 시에 일어나 내적갈등을 깨나 하다 전략을 바꿨다.그전날 나이트의 여파로 늦게 일어난 척하고 그냥 달리기를 한 다음 2차 장소로 가는 거. 반쯤은 성공. 아, 저희 지금 가야 해요. 하는 말에 끄떡도 안 하는 그들 때문에 열 시에야 다같이 병동에 도착했지만, 뭐. -아, 뭘 지금 가, 왜 벌써 가. 아이, 나이트 바빠여. 좀더 있다가 가- 어차피 결과가 똑같을 거라면 그냥 최대한 힘을 덜 빼는 게 낫지.
여름의 달리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해가 징하게 안 져서 이제는 출근 전에 뛰려면 밝을 때 나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아직 8월이 안 와서 그런가. 더운 게 아니라 후끈후끈하다. 땀을 흘릴 일이 좀체 없는 내 몸이 온통 축축하다. 축구장의 선수들이 항상 좀 멋지긴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 팀에 열한 명, 골이 좋은 거고 한 게임이 90분이라는 거밖에 모르는 내가 그 경기에서 볼 게 뭐가 있어. 화장 안 한 얼굴, 다 똑같이 맞춰 입은 유니폼. 땀이 나든 뭘 하든 아무튼 그 시간만은 공 하나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 멋있잖아? 운동선수 덕질 뭐 그런 걸 하겠다는 게 아니라 여하간 스포츠에는 그런 게 있었다. 있는 그대로 멋있는 것.
횡단보도에 서서 괜히 뒷목에 손을 올리면 땀인지 습기인지 모를 게 잔뜩 묻어 있었다. 인중에 물기가 맺혀 흘러내리려 하는 걸 슥슥 닦아야 한다. 땀 묻은 손이 더러울 거라 얼굴에 손대기 싫은데 별 수 없다.
여섯 시 반쯤이면 호수가 주황색이다. 이쁘다. 겨울의 주황색과는 또 다르다. 공기도 주황색 같다. 후덥지근해서. 그 온도 습도의 바깥에서는 걷기만 해도 누구나 땀이 날 수밖에 없는데, 시키지도 않은 짓을 사서 하고 있으면 내가 뭐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분이 그렇다고, 기분이. 언제 바깥에서 그렇게 아무것도 신경 안 쓰는 상태로 서 있을 수 있어. 이 애매한 더위 속에서의 어설픈 뜀박질 아니면 못 한다.
가게 직원들은 다 한국인이던데, 왜 이역만리 떨어진 유럽 리그를 응원하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아니면, 그냥 장식해 놓기에 해외 팀 로고들이 더 예뻐서? 예쁘긴 했다. 근데 빨간색이면 그냥 한국 국대 팀으로 해 놔도 되잖아. 왜 응원하는 거지. 노엘 갤러거가 응원하는 팀은 맨시티였다. 연하늘색 유니폼. 맨체스터 시티. 그리고 여긴 리버풀? 윤두준이 응원하는 팀이 어디더라. 모르겠는데. 축구 유니폼을 하도 많이 입으시는 분이라 어느 팀을 더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주 본 게 파란색 자주색 섞인 거. 바르셀로나. 그렇구나. 그 사람들은 축구가 왜 좋을까.
노엘은 맨체스터 사람이니까, 영국 사람이니까. 근데 이 술집 주인과 윤두준 이기광 씨는 축구를 왜 그리 좋아할까. 러닝과 공을 잡는 게 섞여 있어서? 집중하는 게 좋아서? 그냥 달리기 하나로 해결 가능 아닌가? 조나단과 나온 유튜브 영상을 다시 보니 이건 뭐 축구 게임도 그냥 게임이 아니고 거의 본인이 그 화면 안에서 뛰고 있는 것처럼 하던데, 왜 좋을까. 연고도 없는 팀은 왜 그리 응원하게 되는 거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 시뻘건 휘장이 보였고, 내가 목을 조금 틀면 손흥민이 필드에서 뛰는 걸 영문 글자와 함께 멋지게 인쇄한 액자 등이 걸려 있었다. 사실상 대상만 바뀐 덕질 펍 아닌가. 좋긴 했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노래는 그냥 아무거나 나왔다. 중간에 비가 오는 날에 나와서 좋았다. 반가워서 좋았다. 왜 응원할까.
내가 축구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축구선수들에도 관심 없는데. 다만 그냥 요새 달릴 때 몸이 다 땀으로 젖는 기분은 좋다. 그래서 그들이 축구를 좋아하나? 아, 아빠도 엄청 어릴 때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했다고 했다. 왜지. 그냥 달리기하는 공놀이잖아. 까딱하면 욕 디지게 처먹는. 흠.
맨시티 유니폼은 노엘 때문에 살 수도 있었지만 안 샀다. 별로.. 그냥. 잘 입을지 모르겠어서. 예쁘기는 바르셀로나 거가 이쁘지. 근데 내가 뭐하러 사야 하지. 리버풀? 그냥 빨간색 아니야? 그런데 멋있더라. 왜 You'll never walk alone, 일까. 그냥 축구인데. 비장하더라. 물어볼걸. 여기 왜.. 만드셨어요..? 라고? 못 물어본다. 다시 갈 일도 있을지 모르겠다. 난 그 동네 싫어. 다른 곳 찾을거야.
축구가 그래서 왜 좋은걸까.
왜 한국인들이 상관도 없는 유럽 프리미어 리그를 응원하고 유니폼에 돈을 쓰고 그 경기를 보러 원정까지 갈까.
어떻게 고르는 걸까.
아무튼 멋진 문구였다. 유 네버 워크 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