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불행

250812

by 이븐도





왜 이 시간에 알람이 울리나 했는데 어제 밥을 한다고 맞춰 놓은 거였다. 자는 시간이 들쭉날쭉한 건 아직도 적응 중인 것 같다. 아마 여기서 2년은 더 일할 텐데. 앞으로도 이럴 테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살 게 있어서 코엑스에 갔다. 영화 보러 바로 앞쪽으로 들어갈 줄이나 알았지 그 끝에서 끝으로 움직이자니 온 체력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평생 볼 옷을 다 지나친 것 같다. 몇 년 전엔 몇 번 재미로 오기도 했는데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던 건지 놀라웠다. 근데, 심지어 월요일이었잖아. 주말에는 사람이 얼마나 더 많다는 걸까.



가격은 모든 걸 말하지 않는다. 몇 번 들지도 않았을 백팩 아래쪽 가방끈이 떨어졌다. 뭘 좀 많이 넣기만 하면 바로 미끄러져서 끈이 죽 늘어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망했으면 좋겠다, 그 브랜드. 내가 더 안 사게.

기숙사 살던 때부터 가던 수선집을 찾았다. 아, 이거 비싼 건데, 끈 완전 싼 거 쓴 거 맞죠?그려? 품이 들것는디. 다 뜯어야 혀. 헐. 아저씨는 가방을 다 뒤집어서 안을 살폈다. 우라를 다 봐야 쓰것구만. 가방집에 갖다줘야지, 이런 거는. 그래요? 어떻게 안 될까요? 되지. 언제 올 거여. 내일 한 네 시 넘어서 될까용. 되지. 아하. 넵. 감사합니다.






그는 올 때마다 야위었다. 저렇게 살이 빠진다면 절대 좋은 게 아니겠구나, 생각했다. 다 먹은 식판을 비틀거리며 간이주방으로 가져다 놓는 그 후들거리는 모습이 언젠가부터 늘 불안했다. 그거 이리 줘요, 하면서 여주인공이 든 무거운 걸 낚아채 자기가 드는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가 뭔가를 들고 가는 걸 대신 병실에 갖다놓거나 다른 곳으로 치울 때면.


몇 년 전에는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아주 어릴 때부터 아팠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그와 그의 엄마 앞에서 편하게 농담이나 사담을 할 수 없어졌다. 물론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2년 전인가, 언제는 항상 가면 침착맨 영상을 보고 있었다. 작년 언제쯤부터는 불러도 잘 못 들었다. 요샌 주로 잔다. 그냥 지겨워서일수도. 여하간 쇠약해진 것 같다. 요즘에는 유튜브 뭐 보세요, 라고 줄곧 묻고 싶지만 항상 못 묻는다. 애기였으면 벌써 묻는 건데.




작년에 부인과 병동으로 갔을 때 본 사람 같았다. 고소득 전문직. 하얀 피부, 이목구비. 예뻐서 기억났다. 입원을 받았는데 그 파우치가 무시무시한 약들로 차 있어서 놀랐었다. 무시무시한? 그 약이 무시무시한 게 아니라, 그 약을 먹어야만 하는 통증이 그런 거겠지. 별로 놀랄 일도 아닌데. 다 그런 사람들이잖아. 아무튼 놀랐다. 그 때도 산소를 이렇게 하고 있었나? 아니었다. 그건 기억났다.

애매한 시간이라 사람이 없는 엘리베이터에, 작은 산소통이 쉭쉭거리는 소리가 찼다. 한 번 더 놀랐었다. 애가 둘이나 있는 엄마였어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폈었다. 멋진 직업, 아름다운 외모, 결혼, 딸 또는 아들. 젊은 나이.




어린 애들이 있다. 열몇살쯤 된 애들. 어린데 그 정도로 어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린. 고등학생인 애들. 토할 것 같다고 해서 담당에게 물어보고 항구토제를 들고 갔다. 완치? 완치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나이대가 그런 애들 앞으로 갈 때마다. 나는 태생이 어색한 걸 못 견뎌서 늘 뭐라도 떠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 나잇대 앞에서는 정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다.


다행히 인형이 있었다. 길라임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 하는 대사를 하던 현빈이 입은 것과 비슷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곰인형. 속 좀 가라앉는지 볼게요, 하던 말에는 낮았던 대답이 그 말에는 화색이 돈 것 같다. 이거 옷은, 원래 얘가 입고 있던 거예요, 아니면 따로 사신 거예요? 어떤, 아. 이거요? 테무에서 사서 입혔어요. 아. 이쁘다. 저렇게 잘 나와요? 아, 그럼요. 괜찮아요, 이거. 거기 이런 것도 파는구나. 엄청 많죠오. 이런데 천이백원 이렇게 하니까. 하루종일 보고 있지, 귀여운 거 또 있나, 하면서. 말은 엄마가 다 했지만 걔 표정도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저렇게 병상에 누워 있었어도 그랬겠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늘 가던 스타벅스가 지난 주에 영업을 종료했다. 사이렌 오더에는 맨날 시키던 게 위치를 잃고 메뉴만 떠 있다. 갈 곳이 없어졌다. 투썸플레이스는 고등학교 자습실 같다. 실제로 애들이 많기도 하고 많이 밝아서 그렇다. 외부음식 금지라고 써 놔서 프로틴바 꺼내기도 좀 그렇다. 직원은 어차피 바빠서 신경도 안 쓰겠지만 굳이.. 하지 말라는 걸 하고 싶진 않다고. 옆동네 스타벅스는 지하철역에서 십오 분은 걸어야 한다. 데이 끝나고, 이브닝 출근 전에, 나이트 출근 전에, 오프 때 시간을 죽일 곳이 아예 사라졌다.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갈 데가 없어져서 잠을 잤다. 한 시간만 자야 하던게 일어나니 두 시가 넘어 있다. 김슬기랑 윤두준이 십 년 전에 찍은 웹드라마에 이어 다시 같은 작품에 출연한다. 단막극이다. 한 편짜리 드라마. 십 년이라니. 나는 십 년 후에 뭘 하고 있으려나. 서른 여덟인데. 놀라운 나이다. 내가?


어디로든 가겠지. 카페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근데 없는데. 날이 좀 시원해졌다. 그런데 다시 더워진다고 한다. 집에 갈까, 하다가도, 또 내가 시한폭탄처럼 굴 게 무서워서 못 가겠다. 왜 이 모양인지. 그냥 갈까.




근데 이거 그렇게 빨리 안 해 주셔도 돼요, 하는 말에 아저씨는 안돼야. 내가 안 돼. 어, 왜용. 나 휴가 가. 14일부터 17일까지. 오오. 어디 가세요? 곰배령 가서, 푸욱 쉬다 올 거여, 곰배령 알어? 어, 아니요. 산골짜기인가보네. 어디에요? 인제여, 강원도 인제. 원래 이름은 따로 있는디, 곰이. 이르케, 배를 뒤집어 누워 있는 것 같대서 곰배령이려.

아하. 쉬면 뭐 하세요.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대답은 텔레비전 소리에 못 들었다. 나도 오프 긴데. 일단 하루는 좀 많이 자고. 또 하루는 뭐 하지. 음. 집에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안 가고 싶기도 하고, 또.. 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가고 싶기도 하고. 아, 쉽지 않다.


인제에 황태해장국 맛있는데. 황태정식이랑. 내 인생에 혼자 운전해서 그런 데를 갈 일이 있을까 싶다. 그거보단 수영을 배우러 다니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근데 달리기부터 하고.



나는 그 때도, 언제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